[생로병사]'단비'
  • 입력 : 2013. 08.30(금) 00:00
  • /조상윤기자 sycho@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강기수 제주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오랜 가뭄 뒤 끝에 단비가 내렸다. 휴일 당직이라 연구실 이동식 침대에서 잠깐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창문 너머 언덕이 촉촉히 비에 젖었다. 감귤 밭에도 방풍림위에도, 무덤을 둘러싼 돌담과 돌담 옆 분홍빛 큰 나무도 단비에 젖었다. 언덕 아래 바위 위에도, 가로등과 주차장 아스팔트 위에도 비가 내렸다. 이 비가 오랫 동안 목말랐던 제주의 농부들 모두 살려내기를 기원해 본다.

극심한 복통으로 한 달 가까이 입원한 소녀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되살아났다. 소아과학 교과서의 표준 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의학 저널의 최신 치료도 소녀를 구해내지 못했다. 급기야 병이 소장에서 콩팥으로까지 옮겨 붙어 신장염까지 일으켰다. 여태껏 홀로 소녀를 키워온 간절한 아버지의 마음도, 고통 속에 던져진 소녀를 구해내지 못하는 나의 마음도 타들어 갔다. 근데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소녀에게 새로 발생한 신장염 치료를 의뢰받은 젊은 동료 여교수가 약물 치료 한 방에 소녀를 살려낸 것이다. 소녀는 마침내 극심한 복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아! 단비가 내린 것이다.

외래 진료실과 병실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아이들을 만날 때가 있다. 또는 난치병으로 오랜 세월 하염없이 나를 만나야 하는 아이들도 있다. 치유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소망을 뒤로하고 떠나보낸 아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며칠 전에도 소아병동에서 하늘 나라로 보낸 아이가 있었다. 수년 전에 내가 오랜 기간 진료하던 아이였는데, 그 때의 병이 점점 다른 병으로 커져 생사를 달리하게 된 것이다.

어제 외래 진료실에서, 한 어린 소년의 눈빛을 보았다. 해맑았던 소년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긴긴 난치병 투병 생활 중에 처음으로 '절망'을 알아버린 것일까? 매번 비슷한 말만 되풀이 하는 나는 소년의 눈에 어떻게 비칠까?.

수년 전에도 나는 어느 꿈 많은 중학생 소년의 절망의 눈빛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눈빛은 2년 전 미국연수를 떠나던 나에게, 연수기간 내내 의학연구의 가장 큰 동기가 되어 주었다. 나는 지금 이 소년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근데 정작 나는 매일 단비를 맞고 있다. 진료실에서 병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초롱한 눈망울과 되살아난 생기가, 나의 천직을 이어가게 하는 단비이다. 긴 세월 꿋꿋이 이겨내는 아픈 아이들과 아이들 곁을 지키는 부모님들에게도 단비가 내리기를 소망한다. <강기수 제주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과>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493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