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태생으로 일본 프로 레슬링계의 신화적 존재였던 역도산이 사망한 지 15일로 50주년을 맞는다.
한국에서 2006년 설경구 주연의 동명 영화(송해성 감독)로도 제작된 역도산의 삶은 그 자체로 한편의 영화였다.
본명이 김신락인 그는 1924년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씨름선수로 활약하다 식민지 시기인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듬해부터 `역도산'이란 이름의 스모선수로 뛰다 1951년 프로레슬러로 전향한 뒤 일본의 프로레슬링 붐을 주도했다. 헤비급 세계 챔피언으로 활약하는 동안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서구에 패한 일본인들의 열등감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일본의 국민 영웅이었다.
특기인 `가라데 촙'을 앞세워 전승국인 미국의 거한들을 KO시키는 모습에 일본인들은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가 사망하기 약 7개월 전인 1963년 5월 24일 도쿄에서 열린 '더 디스트로이어'와의 세계 타이틀전은 평균 시청률 64.0%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까지도 일본 TV사상 역대 시청률 4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큰 부와 인기를 누렸던 그는 1963년 12월8일 도쿄의 한 나이트클럽에서 조직폭력배와 실랑이 끝에 복부에 칼을 맞았고,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12월15일 복막염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생전에 역도산은 한반도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피는 속일 수 없었는지, 1963년 1월 극비리에 방한, 판문점에서 웃통을 벗은 채 절규하며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토해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는 한국에서도 한민족의 기백을 널리 떨친 인물로 각인돼 있지만 나고 자란 북한에서는 지금까지도 영웅시되고 있다. 미국과 각을 세운 북한 정권은 미국 선수들을 제압한 그를 '반미의 상징'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평양에서는 기념우표와 술, 전기 등 역도산 기념상품들이 아직도 팔리고 있으며 그의 생애를 소개한 기록영화 '나는 조선인이다'는 요즘도 TV에 방영되고 있다.
일본 매체들은 역도산 50주기를 맞아 그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다. 특히 남북, 한일, 북일관계가 꼬일 대로 꼬인 지금 남북한과 일본에서 동시에 사랑받는 그가 살아 있었으면 관계개선을 위해 모종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고 교도통신은 소개했다.
역도산의 제자로, 현재 현역 국회의원(참의원)인 안토니오 이노키(70)씨는 교도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라고 스승을 회고한 뒤 "일본, 한국, 북한에서 역도산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나도 그의 투혼을 잇는 존재로서 세 나라의 융화에 공헌하고 싶다"며 포부를 밝혔다.
또 통산 3천 안타를 달성하며 일본 프로야구계를 호령한 장훈(73)씨는 생전의 역도산에 대해 "강하고 멋진 외모에 남자다움과 결단력까지 갖췄다"고 평가하고 "스포츠맨은 정치색이 없는 만큼 교류관계를 쌓기 쉽다"며 "지금과 같은 시대에 그가 살아있었으면 어떨까하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씨름협회 사무총장을 지낸 김학웅(72)씨는 "1963년 역도산이 방한했을 때 서울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소개한 뒤 "일본에서는 한국 출신임을 밝히지 않았지만 여기선 이전부터 한반도 출신임을 알고 있었다"며 "남자 중의 남자, 호걸이라는 것이 첫 만남에서 받은 인상이었다"고 회상했다.[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