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천상병은 '귀천(歸天)'이란 시에서 삶을 아름다운 세상에서의 소풍이라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죽음은 곧 잠깐 동안의 소풍을 끝내고 원래 내가 있던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선조들은 삶과 죽음을 삶의 연속으로 여겼다. 이승이 삶인 것처럼 저승도 삶이다. 이승이 이쪽 세계에서의 삶이라면 저승은 저쪽 세상에서의 삶인 것이다. 이승은 '이 생(生)'이 변한 말이고, 저승은 '저 생(生)'에서 변한 말이라 한다. 사람이 죽게 되면 이쪽 세계에서 사는 삶은 마쳤지만 저쪽 세계에서는 또 다른 삶이 시작되는 것이니 슬퍼할 일만이 아니며 축제의 성격이 가미돼 상례(喪禮)를 치른 흔적을 볼 수 있다.
지금도 상갓집에서 음식을 내어주고 함께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시고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은 그래야 슬픔에 빠진 상주와 가족들을 위로하며 텅 빈 가슴의 허한 자리를 채워 주려는 마음 따뜻한 인간애와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을 하나로 통합해 조화롭게 극복해 온 우리 조상들의 슬기로움의 발로로 이해된다.
1915년에 태어나신 어머니가 보름 전 99세를 일기로 귀천하셨다. 항상 받기만 하면서 평소에 잘 해드리지도 못하고 늘 모자라고 죄송스럽게만 여겨지는 어머니, 평생을 맞대고 살아도 늘 그립고 아픈 이름 어머니….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다 호상(好喪)이라 한다. 여기저기서 웃음소리도 쉽게 들린다.
처가에서도 처남 처제들이 문상을 와 며칠째 바쁘고 지친 아내를 불러들여 잠시 쉬게 한다. 평소 유머가 많은 처제가 무슨 재밌는 이야기를 했던지 아내는 고개를 들고 웃다가 어느 점잖은 신사와 눈을 마주쳐 그만 고개를 떨궜다. 그런데 계속되는 처제의 우스개에 자기도 모르게 또 고개를 들고 웃다가 다시 그 노신사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단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추며 일어섰다는데 예전에 상여꾼들은 만능 엔터테인먼트로 조문객들은 물론 상주와 가족들을 울고 웃기며 노래도 부르지 않았느냐며 아내를 위로했지만 아무래도 그 신사의 시선이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았다며 못내 죄스러워 했다. 오십 중반인 동생은 상례 모습을 사진 찍겠다 한다. 그런데 칠순이 다 된 형님은 화들짝 놀래신다. 나는 찍자 했다.
중학교 때인가? 평화봉사단으로 온 마이슨이라는 젊은 미모의 외국인 여교사가 있었다. 우리는 미스 마이슨이라 불렀다. 하루는 어느 선생님 댁에 상이 나 문상을 갔는데, 시골에서 펼쳐지는 장례 풍경에 미스 마이슨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이국땅에서 생전 처음 보는 장례모습이 생소하고 신기했던지 카메라를 들고 분주하게 마당을 뛰어 다니며 셔터를 누른다. 급한 김에 노인들 앞에 펼쳐진 상을 짧은 치마 속 길다란 다리를 쭉 뻗어 넘기도 했다. 오히려 노인들이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 중 한 노인이 쯧쯧 혀를 차며 "저, 저년 저 가달머리~."
우리들의 소중한 전통문화 풍경들을 그들은 가지고 있는데, 정작 우리에겐 그 귀한 자료가 없다. 어머니는 40년 전 당신이 직접 마련한 고운 명주 수의를 입으셨다. 멋진 색동 두루마기에 버선과 모자도 갖추어 단단히 떠나실 준비를 마치셨다. 먼저 가신 아버님이 마련해 두신 개판도 차례대로 정돈되어 순서를 기다린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세상에서의 새로운 시작이라 성경은 말씀하신다. 이별을 예견하는 듯 암 투쟁을 하시던 이해인 수녀님도 해질 무렵 어느 날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삶은 가끔 눈물겨워도/아름다웠다고 고백하는/해질 무렵 어느 날"
어머님의 삶도 분명 아름다웠으리라 확신한다. 어머님의 영전에 삼가 명복을 빈다.
<김천석 제주문화곳간 바람이 머무는 숲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