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논단] 나는 갑오년, 4·3 66주년. 4월 3일이면 법정기념일이 되는 4월 1일, 4·3평화공원과 기념관에서 시작되는 두 개의 전시를 보고 있었다. 4시에는 평화공원 광장 시화전에 걸린 벽면의 시들 중에서 내 시는 좀 길어서 읽기 곤란하겠다 하며, 나의 시 '4·3트라우마를 치료한 그날 이애주의 춤'을 읽으며, 이 시를 쓰게 했던 1992년 다랑쉬굴 앞 공터에 마련된 굿청에서 신들린 사람처럼 저승길을 닦아나가며 맨발로 춤추던 춤꾼 이애주 교수의 춤 '베가르기'의 기억을 더듬어 2012년 11월에 있었던 서울 조계사 이애주의 춤 60년을 기념하는 세미나에서, 그때 1992년 4월굿에서 이애주 교수가 춤이라는 몸글로 써 내려가던 굿판의 배가르기를 추억하며, 그때의 이애주의 춤은 4월의 영혼들을 해원하고, 살아남은 후손들의 4·3트라우마를 치료한 해원상생굿이었다는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념관으로 갔다.
5시부터는 4·3평화기념관 2층 예술전시실에서 박경훈의 4·3목판화전이 열리기 때문이었다. 20여년 전에는 까맣게만 보였던 일련의 작품들이 모두 버릴 것 없는 수작이었다. 그래서 다시 보는 박경훈의 목판화전은 아름다웠다.
나는 그의 전시를 언제부터 보았을까. 난 언제 그의 판화에 콩깍지가 씌웠을까. 1985년부터 1990년쯤이 아닐까. 아마 그때 그는 2말3초의 소리만 유난히 큰 청년, 민미협이라 부르는 민중미술인연합의 회원이었고, 제주 판화 모임 보름코지 동인이었다. 그의 판화는 누구나 좋았다 하지만 나는 칭찬에 인색했다. 나는 박경훈의 판화에 대해 말할 때는 "야, 박 판화. 시커멍허게 찍어내기만 허민 민중미술이라?" 하였다. 사실 난 그것이 욕이 아니라 칭찬이었다. 섬세한 칼맛을 가진 재주꾼인 줄은 알았지만, 칭찬에 좀 인색했다 할까. 그래서 늘 눈여겨보지 않는 듯했다.
1987년이었을까. 전 정권이 무너지고 이한렬 열사의 노제에서, 이애주 교수가 시청 앞 광장에서 바람맞이 춤을 추던 시절 데모 현장, 싸움의 현장에는 대형의 걸개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장의 앞과 뒤에 민미협 판화가 있었다. 그렇게 까맣고 칙칙한 시대의 그림자 때문에 멋져보였던 박경훈의 판화, 그때 나는 그의 판화의 미학으로 발견한 시적 이미지가 있었다. 그것은 '철가시꽃'이었다. 천형처럼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철가시꽃'에서 박경훈 판화의 시적인 칼 맛을 느꼈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한 20여년을 훌쩍 넘기고 다시 보는 그의 판화는 바람곶 제주의 어머니와 누이가 주는 사랑, 그리고 동생을 업은 아기업개의 사랑, 제주다운 것의 힘이었다. 그가 판화로 날리던 때는 33세부터 28세쯤 됐을 때일 거다. 한마디로 어린 때다. 90년대에 강요배의 4·3역사화가 4·3의 스토리를 독점하기 전, 2말3초(20대말 30대초반)의 판화가 박경훈은 정말 재능있는 환쟁이였다.
그리고 박경훈 판화의 칼맛은 제주다움이었다. 그의 판화는 강한 저항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철가시꽃' 보다는 동생을 천형처럼 등에 업고 살았던 우리의 누이, 아기업개의 사랑, 항파두리 철문을 여는 지혜를 이야기해 준 아기업개, "두 이레 열나흘 불을 때면 되주" 하여, 불을 때어야 철문을 녹일 수 있고, 성을 함락시킬 수 있다고 말해주는 '아기업개의 지혜'가 박경훈의 판화 속에 담겨 있었다. 정말 좋은 판화들이 많았다. 박경훈의 판화는 '바람곶에 사는 아기업개의 지혜'를 들려주는 목판화였다. <문무병 시인·민속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