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0)/제2부-사라진 성, 훼손된 성곽](4)헐어버린 건물들(상)

[천년의 유산 제주城을 살리자(10)/제2부-사라진 성, 훼손된 성곽](4)헐어버린 건물들(상)
공신정 파괴 신사 건립… 일제 제주성 허물기 축소판
  • 입력 : 2014. 05.14(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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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대 초 선교사가 촬영한 산지천 하류 풍경. 왼쪽 위로 공신정 건물이 보인다. 사진=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수록

지난해 공신정 터 제주기상청 신청사 건립 논란 불거져
청사 건립 철회되고 제주성 정비계획·공신정 복원 추진
역사문화 경승지로서 경관 살리도록 큰 틀서 접근해야


일제가 허문 것은 성문과 성곽만이 아니다. 제주성과 관련된 유서깊은 건물과 누각들도 일제강점기에 차례차례 헐렸다. 제주성이 해체되고 문루가 파괴되면서 고유의 역사문화경관은 차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경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한 왜곡된 역사문화 경관은 현재까지도 천년 고도 제주시의 정체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 흔히 얘기하는 국적불명의 도시경관이 제주성 훼손 철거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난 해 학술문화단체의 거센 반발을 사면서 첨예한 논란이 불거졌던 이슈 중의 하나가 바로 제주성의 대표적인 누정이었던 공신정 터에 제주기상청 청사신축 문제였다. 공신정 문제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제주성 허물기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공신정의 약사를 통해 제주성 수난사를 들여다보자. 공신정은 원래 1653년(효종 4) 목사 이원진이 산지천 하류의 무너진 북수구를 복구하면서 그 위에 문루를 세워 공신루(拱辰樓)라 한 것이 처음이다. 북수구는 현재 복개된 산지천의 북성교 근처에 있었다. 공신루 이전 북수구에 있던 문루는 죽서루라고 하였으나 이원진 목사가 중건하면서 공신루라 하였다. 이후에도 북수구는 몇 차례 개축을 거듭했다.

공신루는 1808년(순조 8)에 한정운 목사에 의해 중건되면서 공신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공신정이 북수구에서 삼천서당 북쪽인 현재의 제주기상청 인근으로 옮겨진 것은 1831년(순조 31)이다. 이예연 목사가 홍수 때마다 홍문과 누정이 무너지고 물길이 가까이 있어서 이로 인한 백성들의 피해를 덜어주기 위해 이건한 것이다. 공신정은 이후 1848년과 1884년에 이어 1904년 홍종우 목사에 이어 마지막으로 중수된다.

공신정이 일제에 의해 헐리게 된 것은 1928년이다. 일제는 내선일체 정책을 강화하면서 전국 각지에 일본식 신사를 조성하게 된다. '제주신사'를 세우면서 공신정을 허물어버린 것이다. 제주신사는 1945년 광복을 이루기까지 존치했으나 그 해 10월 건입동 청년들에 의해 부숴진 것으로 알려진다. 일제는 공신정을 허무는 것도 모자라 그 자리에 신사를 짓기까지 한 것이다. 공신정 터는 광복 후에는 '적산'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지난해 모 다원에 방치돼 있던 공신정 주춧돌을 제주목관아로 옮기고 있다. 이윤형기자

이후 한국전쟁을 거쳐 1956년에는 제주중앙교회가 들어섰다. 당시도 제주읍내의 유림과 원로들은 조선시대 유명한 정자인 공신정이 있던 명승지에 교회가 들어서는 것에 대해 크게 반발했다. 당시 교회측은 명승지 주변경관을 철저히 보존하겠다는 설득 끝에 1956년 교회를 신축할 수 있었다. 교회는 지난 해 제주기상청이 청사신축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전한 상태이다.

공신정은 일제강점기까지 존치됐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자료는 거의 없다. 단지 1900년대 초 제주를 방문한 선교사가 남긴 흑백사진에 공신정이 현재의 제주기상청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일제가 공신정을 허무는 과정에서 나온 건물 주춧돌이 있다. 공신정 주춧돌에도 우여곡절이 있다. 주춧돌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 마당 구석에 있었다. 하지만 행정당국의 관심부족 등으로 한 다원에 옮겨졌다가 지난해에야 본보 보도로 소재지가 파악돼 현재 제주목관아에 옮겨진 상태이다. (본보 2013년 11월25일자 5면)

또한 기상청 주변에는 공신정 주춧돌이 화분으로 쓰이고 있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공신정 규모 등을 파악할 수 있는데다 복원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귀중한 유물이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신정 사례는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주성 훼철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주시내 주택가에 방치된 채 화분으로 쓰이고 있는 공신정 주춧돌. 이윤형기자

1897년부터 제주에서 4년 동안 유배했던 운양 김윤식은 유배생활을 기록한『속음청사』에서 공신정과 북수구 일대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제방 위에는 파란 버드나무가 빙 둘러있고 언덕 위에는 사람 사는 집이 있어 복숭아꽃이 곳곳마다 활짝 피었다. 그림과 같은 경치이다. 정자(공신정) 밑에는 세 곳에서 물이 솟는데 샘물 맛이 아주 뛰어나서 이 정자가 이름이 나게 된 것이다"라고 찬탄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노정객의 눈에도 공신정과 북수구 일대의 경치는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공신정 터는 제주기상청이 청사신축을 철회하고 보존키로 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일제에 의해 사라져버린 공신정 복원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와 제주시는 제주성 정비계획과 함께 공신정 복원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그렇지만 단지 공신정 누정 하나를 복원하기보다는 제주성 최고의 역사문화 경승지로서의 경관을 살릴 수 있도록 보다 큰 틀에서 접근해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공신정 복원은 일제에 의해 훼철된 제주성을 어떻게 정비하고 보존 활용해 나가야 하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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