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아침이 밝았다. 지난 어두운 것들은 지우고 따뜻하고 명랑한 것으로 나아감이 옳다. 지난해 우리는 대화를 잃어버리고 살았다. 대화란 서로 마주하여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인데, 여기에는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남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확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하여 현명한 이는 말을 하는 것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다.
지난해 세밑 제주도와 도의회의 예산안과 관련한 불통을 보면서 제주도민들은 참담함 그 자체였다. 누구의 말이 사실이며 진실이냐를 떠나서 그 지경에 이른 제주 정치의 비루함을 한탄했을 터이다. 자신의 말을 앞세우고 주장을 과시하는 이면에는 탐욕과 두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이것은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몽매에 지나지 않은데 자신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관련이 된다면 그 사람들에게도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하는 불통의 폐해를 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도와 도의회의 불통으로 하여 제주도민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되고 더러는 참담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고 해도 진정한 대화를 거부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자신의 주장과 말만을 앞세울 수가 있었을까.
지난 한해 위정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몇 가지 슬픈 장면들이 지나간다. 청와대의 일들도 그렇거니와 국회의 여당과 야당의 대결 구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제주도와 도의회의 모습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문화 예술에 관련된 이들로부터 불거져 나온 일들은 또 얼마나 우리를 부끄럽게 했던 것일까. 대타의식의 부재였다. 우리는 초등학교 4학년쯤이 되기만 하면 교과서를 통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을 배우게 되는데, 어쩌면 우리는 인간 통성을 너무 일찍 배우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를 잊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신라 경덕왕 때의 일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미루어 짐작하면 내우외환이 어느 때보다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 재위 말년 24년에 지은 충담사의 <안민가>는 경덕왕에게 제시하는 바른 정치의 모습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당시의 상황을 리얼하게 짐작할 수도 있다. "임금은 아버지고/신하는 자애로운 어머니며/백성은 어린애라고 하실 때/백성이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부분에서 위정자들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고 마치 도구나 수단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고, "임금답고 신하답고 백성다울 수 있다면/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에서는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직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권위를 내세우는 일이었겠지만 얼마나 허무한 일인가.
동서고금을 떠나 인간 통성에 호소할 수 있는 대화는 달변인 경우가 없었다. 예로부터 묵언으로 깨달은 사람은 있어도 달변으로 깨달은 사람은 없다는 말은 오늘 우리에게도 천둥처럼 울림이 될 만하지 않은가.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애정이고 관심이다. 자식이 진정 사랑스럽다면, 하는 말이며 어떤 행동 하나라도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말과 행동이 모두 소중하다고 생각하게 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자연으로 가까이 가서 무한한 생명의 힘을 얻는다고 하지 않는가. 국민의 말과 행동에 귀를 기울이는 것, 도민의 아픔과 기쁨에 함께하려고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야말로 소통의 시작이다.
'성인(聖人)'이란 말을 파자적으로 풀어보면, '耳(이, 귀)+呈(정, 드러나다)+人(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귀가 드러난 사람', 곧 '귀가 밝은 사람'이고 자연과 사람을 향해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좌지수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