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제주, 희망은 사람이다]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더 큰 제주, 희망은 사람이다]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
"제주는 가장 든든한 배경"
제주일중 졸업후 서울로…방송사 PD로 사회 첫 발
  • 입력 : 2015. 04.29(수) 00:00
  • 부미현 기자 bu8385@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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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제주출신 방송사 PD 1호인 고학찬 예술의전당 사장은 사장 내정 당시를 회상하며 "보란듯이 성과를 증명해 보이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고 말했다. 부미현기자

제주출신 예술가에 관심
인맥 없는 제주출신의 '비애'
취임초 낙하산 오해 사기도…

국내 예술인들에게 예술의전당은 꿈의 무대다. 이 곳에 섰을 때 비로소 대중들은 물론 예술계에서도 인정받게 된다. 국내 최고의 시설을 갖춘 곳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최고 전문가들의 까다로운 심의를 거친 후 비로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1988년 설립돼 대한민국 최초의 복합아트센터로서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발전과 부흥을 이끌어오며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는 예술의전당. 그 사령탑에 제주출신 고학찬(68) 사장이 있다. 우리나라 문화의 변방인 제주섬이 낳은 인물. 그래서 고 사장은 더욱 소중한 제주의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지난 17일 서울 서초구 소재 예술의전당에서 고 사장을 만났다. 최근 들어 그에 대한 중앙언론의 인터뷰가 줄을 잇고 있는 상황이다. 그가 취임 후 2년 사이 확 달라진 예술의 전당에 대한 호평 때문이다. 일부 계층에 특권처럼 소비되던 예술의전당이 더 많은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그가 이뤄낸 가장 큰 성과다.

"국립오페라단이 나라 예산 15억원을 들여 공연을 만듭니다. 그리고 3일 공연을 마친 뒤 무대를 허물고 더 이상 공연은 이뤄지지 않죠. 저는 그 공연을 영상화해 지역문화회관이나 극장에서 상영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돈이 없거나 지역에 있는 이들이 고급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 것이죠."

평소 문화융성은 문화저변 확대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그의 신념이 가시적인 성과를 낸 결과물이다. 고 사장이 시작한 가곡의 밤, 동요콘서트, 서예박물관 리모델링 사업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를 위한 사업의 일환이다. "클래식은 보통사람들이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가곡은 일반 사람들이 접근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클래식이라고 할 수 있죠. 어린이들이 부르는 동요도 클래식으로 갈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순수 과학이 중요하듯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의전당은 그런 것들, 가장 기초가 되는 예술분야의 기초를 굳건히 하는 책무를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파격적인 사업 시도는 그의 남다른 근성이 아니었으면 시도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영상화사업의 경우 워낙 많은 반대에 부딪쳐 국회가 예산을 책정해주지 않으면서 자체 예산으로 어렵사리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뚝심은 기대 이상의 결과물로 이어졌고, 결국 정부로부터 우수성공사례로 선정됐다.

"저는 인터뷰 때마다 '헝그리 복서' 정신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주 출신으로서 어디를 가도 외로움을 느꼈고, 능력으로 인정받기 위해 싸워야했기 때문입니다. 제주를 떠나온 50년 동안 하는 일마다 그런 정신으로 임했고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제주제일중학교 졸업 후 누나가 살고 있던 서울에 있는 고교로 진학한 고 사장은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를 졸업하고 1970년 당시 최초의 방송사 TBC PD 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서수남·하청일 듀오가 주연한 라디오 뮤지컬 '유쾌한 샐러리맨' 등 그가 PD 시절 히트시킨 프로도 적지 않다. 제주출신에다 연극영화학과 출신 1호 PD였기에 인맥이 전무했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서기를 해야 했었다. 그게 오기로 작용해 하는 일마다 남들보다 더 고민하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 과정은 예술의 전당 사장이 되어서도 똑같이 재현됐다. 예술의 전당에서 전체 직원 중 유일한 제주출신으로 취임 초기엔 박근혜 정부 낙하산 1호라는 비아냥도 감수해야 했던 그다.

"그동안 예술의 전당 사장은 대부분 관료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술계에서 크게 이름이 없었고 제주출신인 제가 사장에 내정되자 정말 많은 뒷얘기가 나왔습니다.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기획력을 인정받아 내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때도 마음속으로 성과를 통해 증명해보이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오기만큼 그의 도전정신도 만만치 않았다. 33세 때 불현 듯 가족들과 함께 연고도 없는 미국으로 떠난 것이 대표적이다. 그가 살면서 경험한 직업이 방송사 PD, 바텐더, 의류제작 판매상, 예식장 사장, 작사가, 교수 등 25가지에 이른다니 그 경험치가 재단키 힘들 정도다.

"원래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미국행을 택했을 때 가족들이 상당히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이라는 나라는 아무런 배경도 없는 제가 한인들을 위한 라디오방송을 하겠다고 제안하니 선뜻 받아주더군요.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는 못했지만 주파수를 배정받아 제 집에서 아나운서 출신 아내와 함께 한국어 방송을 했습니다."

당시 영어 구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재미교포 한인들은 세탁소, 생선가게 등 일터에서 그의 방송을 들으며 위안을 얻었다. 그는 집에서 라디오 방송을 하며 어린 자녀들이 울면 음악을 틀고 아이들을 챙겼다는 에피소드도 전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쫓는 그에게 고향 제주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다. 서울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고향. 하지만 낙후된 제주도의 문화적 환경은 하루빨리 바꾸고픈 마음이 크다.

"문화얘기를 꺼내면 예산문제를 거론하며 난색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주도는 제주만의 문화역사스토리가 있습니다. 제주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제주의 공연을 야간에 볼 수 있도록 한다면 좋은 관광 코스가 될 겁니다. 또 360개 오름 중에 꼭대기 분화구처럼 파여 있는 오름 하나를 골라 그걸 극장으로 만들면 어떨까요. 제주의 오름은 신이 만든 극장입니다. 전국 어디서나 하는 축제 대신 설문대할망 축제라 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들을 선발하는 축제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제주가 갖고 있는 문화자산은 무궁무진합니다."

예술의 전당 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완수하기 위해 매일 남은 임기를 카운트하며 업무에 매진하고 있다는 고 사장. 도외에서 활약하는 제주출신 인재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도민들에게 부탁했다.

"예전에 뉴욕에 있을 때 뉴욕문화원에서 제주출신 중광스님을 주제로 행사를 여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백남준 등 뉴욕에서 유명한 인사는 전부 왔었죠. 하지만 정작 제주에서 그의 발자취를 보기란 어렵습니다. 자산이 있으면 그걸 키워야 합니다. 제주가 도외에서 활약하는 제주출신들에게 좀 더 큰 관심, 애정을 준다면 제주에는 큰 자산이 되리라 봅니다."

인터뷰 말미, 고 사장은 초등학교 시절 학교 건물이 없어 바닷가 수업을 하며 노래 실력을 키웠다며 흥겨운 제주 민요 한 곡을 즉석에서 불렀다. 그리고 언젠가는 제주에서 꿈꾸던 일을 해내겠다는 다짐과 함께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고학찬 사장은 누구?]방송계 입문→예술의전당 사장

▷1947년 제주시 용담동 출생 ▷1966년 서울 대광고 ▷1970년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1970~1977년 TBC 동양방송 PD ▷1977~1980년 방송작가 활동 ▷1982~1989년 뉴욕 KABS 편성제작 국장 ▷1994년 ㈜제일기획 Q채널 국장 ▷1995년 삼성영상사업단 방송본부 국장 ▷2002년 9월 국제자유도시포럼 영상문화 분과 위원 ▷2004년 제주영상위원회 이사, 운영위원, 외자유치위원회 위원 ▷2006년 OBS 설립 추진단장 ▷2006년 11월 지상파 DMB방송 U1미디어 시청자위원회 부위원장 ▷2008년 8월 세계 제3회 델픽대회 조직위원 이사 ▷2010년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 문화예술체육 분과위 간사 ▷2009~2012년 윤당아트홀 관장 ▷2013년~ 예술의전당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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