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는 소중한 국가보물인 '탐라순력도'가 있다. 이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 이형상이 1702년(숙종 28년) 한 해 동안 제주도 각 고을을 순시하며 거행했던 행사 장면을 그림으로 기록한 채색 화첩으로 김남길 화백이 순력의 모습을 행사별로 총 41폭에 그려냈다.
이 순력도는 비단 그림만이 아니라 18세기 초 당시 제주도의 관아 건물, 군사 시설, 지형, 풍물 등을 각각의 폭 하단에 기록해 조선시대 후기 제주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다행히 목사 후손들이 보관해오던 것을 제주시가 1998년에 매입해 국립제주박물관에 기탁하여 전시 중이다.
만약 '탐라순력도'가 없었다면 19세기 초반 서양인에 의해 찍힌 몇 장의 사진을 제외하고는 당시를 확인할 방도가 없다. 18세기 제주, 대정, 정의현성의 3읍성과, 9진, 25봉수 38연대에 대한 규모며 위치, 병기점렬, 시사(試士), 제주의 말과 귤의 진상준비를 하던 광경 등을 상상 속에서만 논의할 뿐 재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극히 사료가 빈약한 제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현대 제주유산 문화 콘텐츠로서 그 가치가 다시 확인된다.
'탐라순력도'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순력도'라는 이름 아래 출처와 목적이 분명하다. 또한 당시 제주의 최고 수장인 목사가 제주도 전역을 순례했던 내용을 광역도가 아닌 당시 기초단체인 제주시가 먼저 그 가치를 인정하고 매입했다는 점도 의미있다. 더불어 제주시가 1999년 막대한 예산을 들여 영인본을 제작해 공개함으로써 제주의 두 번째 지정 보물인 '탐라순력도'를 행정의 것으로 꼭꼭 숨기지 않고 도민의 것으로 인지시키는 작업을 했다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국가에서 인증된 보물이 우리 제주에 있고 얼마든지 우리가 공유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자랑스럽고 생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관광객 증가와 함께 많은 변화가 있는 가운데 인구 이동에 따른 지각변화를 눈여겨 볼 만하다. 2010년 이후 증가하기 시작한 인구는 2014년에 1만 1000여명이 순유입 됐다고 한다. 이미 이주 경제인, 문화 이주민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고 있지만 어떤 이유로 제주에 정착했든 이미 사회적 트랜드로 자리 잡았고 문화적 변화에 일조하고 있음은 확실하다.
아무리 유입인구가 늘었다고 해도 공통적인 견해는 제주도는 육지부와는 다른 제주만이 갖는 '문화의 독특성'은 존재 이유라는 점이다.
당시 이형상 목사도 아마 이 부분을 인지하지 않았을까? 당시 최고의 지도자인 목사가 제주도 일원을 돌면서 당시 400여년 전에 없어져 버린 '탐라'라는 명칭을 붙인 기록화를 남겼다는 것은 변방 제주에서 그는 탐라를 느꼈고 제주인이 탐라의 후손임을 인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제주목사 로서 재임기간은 10개월 남짓이었으나 그 사이 행해진 행보는 탐라의 색을 퇴색시는 한편 탐라의 전통을 존중하기 위한 양면정책이었다.
그가 제주의 학문진흥과 문화재의 고적수리 보존, 미신적인 인습과 악습을 타파해 제주도민들의 풍속을 교화하고 생활을 개선하는데 치중했던 기저에는 도민 깊숙한 곳에 흐르고 있는 탐라정신을 존중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까지도 이형상 목사의 치정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가 보여주었던 변방의 전통문화에 대한 존중과 교화는 30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현재 지방자치시대를 살아가는 시점에서 위정자들이 꼭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오수정 제주특별자치도의회 정책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