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진정한 지식인은 없는가?

[하루를 시작하며]진정한 지식인은 없는가?
  • 입력 : 2016. 06.01(수)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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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라는 책에서 지식전문가와 지식인을 구분해 설명한다. 즉, 어떤 분야에 깊은 학식을 갖췄거나 최고의 기술력을 지녔다고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문직업인들이나 학자들은 지식인이 될 자격을 갖춘 지식전문가일 뿐이다. 지식인은 여기에 더해 사회의 모순을 제대로 바라보며 사회적 책임감을 다할 때 도달하게 된다.

미국의 지성 노엄 촘스키 역시 "지식인이란 진실을 밝히고 대중들이 늘 깨어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올바른 사회를 위한 지식인들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지식인의 어원이 '지식인이란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까지 참견하는 사람'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에서 시작하였지만, 이 말이야말로 정확한 표현으로 보인다. 자신의 이익에만 집착하는 이들은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는 결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기에 종종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혹은 가치관의 혼돈의 시대에 전문가들은 침묵을 하거나 중립적 입장을 취할 뿐이다.

하지만, 중립은 가장 쉬운 처세술이기도 하다. 우리는 흔히 양쪽을 모두 아는 곤란한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 어느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중립에 서는 경우가 많다. 이는 상황의 옳고 그름의 판단보다 나를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취하는 행위다.

그런데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혹은 사회적 문제에서 전문가들이 이런 입장을 취한다고 상상해 보라. 옳고 그름의 판단에 앞서 자신의 지위 혹은 이익을 위해 중립이라는 명분으로 침묵한 채 잘못된 정책들을 그대로 지나쳐버린다면 과연 사회는 제대로 굴러갈 수 있을지? 그렇기에 서슬 퍼런 독재시절에도 할 말을 했던 리영희, 장일순 선생 같은 분들을 실천적 지식인이라 부르는 것이다. 권력의 편에 서기보다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정의로운 지식인들 대신 일신의 안위를 위해 중립적 침묵을 지켰던 이들에게 사회 지도층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 탓인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협하는 가짜 지식인들이 난무하고 있다. 사회적 파장을 불러온 가습기 살균제 문제만 하더라도 살균제의 독성을 알면서도 실험을 조작해준 전문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사회의 정의를 판단해야 할 법조인들이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버젓이 하기도 한다. 연일 뉴스를 장식하는 '정운호 사건'에서 보듯 서민들은 상상도 못 할 몇백 억의 수임료를 위해 부도덕한 기업인들의 변호인 역할을 너무도 당당히 자처한다. 그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했을 때 축하 현수막을 내걸며 기뻐했을 모교 혹은 고향의 누군가가 기대했던 모습이 이런 것일까?

제주 역시 이 같은 현상이 다르지 않다. 좁은 지역사회인 탓에 서로가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잘못된 부분을 짚고 넘어가기보단 침묵으로 일관하며 상황을 모면하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정책에 의한 난개발과 불법적 환경 훼손마저 어느 순간 슬그머니 문제가 없던 것처럼 지나가 버린다. 각종 위원회의 절차적 적법성을 거쳤다는 이유로 정당화되기도 한다. 전문가들의 암묵적 동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각종 정책을 위한 논리개발을 위해 전문가들의 지식과 능력이 활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적 정의 대신 지배층의 논리를 위해 이들의 능력이 활용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최근 급변하는 제주사회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지식인들의 양심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길 바란다. <조미영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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