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담론]마패에 숨겨진 코드

[목요담론]마패에 숨겨진 코드
  • 입력 : 2016. 09.08(목)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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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비쌌던 나무는 뭘까? 지난 리우올림픽 때 수여한 금메달의 제작비는 개당 68만원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 정도를 나무로 만든다 해도 임금님의 윤허가 필요할 만큼 비싼 나무가 있었다.

"제3사가 산유자(山柚子)나무로 만든 다종(茶鍾) 1부를 내주며 이 모양대로 30부를 만들어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목재는 원래 쌓아 놓은 데도 없고 시중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부득이 상의원에 공문을 보내 통판 2립을 가져다 쓰겠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승정원일기 인조 25년 3월3일).

"정사가 청구한 산유자나무로 만든 사발은 40개인데, 이 재목은 본래 공물이 없고 사 올 길도 없습니다. 전에 청구하였을 때에는 상의원에 있는 것을 입계하고서 가져다가 썼으니, 이번에도 전례대로 가져다가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승정원일기 인조 27년 1월21일).

그런가 하면 이런 이야기도 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조실록 4월 호패에 관한 규정이다. 동·서반 3품으로부터 성중관과 유음자제(有蔭子弟)에 이르기까지는 산유자나무를 사용하되 무음(無蔭)·양인·공사천(公私賤)·향리·역자(驛子)·부리(府吏)·서도(胥徒)와 민정(民丁)·군사 등은 잡목(雜木)의 백색패(白色牌)를 사용하라. 즉 고위관리나 그 자제의 호패는 산유자나무로 만들고, 그보다 낮은 관직이나 직이 없는 일반인은 잡목으로 만들어 사용하라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승정원이 정한 업무처리지침에 나와 있는 오늘날의 신분증이랄 수 있는 부신(符信)은 23종류가 있었다. 그중 마패를 비롯한 적어도 열 종류 이상을 산유자나무로 만들었다. 그러니 산유자나무는 이래저래 끊임없이 공급되어야만 했다. 물론 마패는 주로 황동으로 제작했는데 때로는 나무로 만들기도 했다.

또한 옛 기사를 보면 이 산유자나무가 제주도에서만 날 뿐 아니라 감귤나무와 동격으로 귀하게 취급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목민심서 공전 6조에는 제주에서 산유자나무는 그 곁에 가까이 사는 사람을 지정하여 보살펴 지키게 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렇게 귀히 대접을 받거나 받는 나무를 본 적이 있나요? 그런데 오늘날 이 산유자나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알고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전혀 엉뚱한 나무로 착각하고 있다.

최근 한 학술지에는 이 산유자나무를 이나무과에 속하는 산유자나무(Xylosma congesta)로 다룬 논문이 게재되었다. 이렇게 혼동하여 쓰는 예는 자연과학에서는 물론 전통지식이나 역사를 다루는 분야에서 거의 무차별적이다. 이러다가 산유자나무가 진짜 산유자나무가 될 판이다. 감귤 중에 유자가 있어서 그런지 감귤의 일종으로 잘 못 쓰는 경우도 흔하다.

이러한 혼란은 우리나라 수목학이나 분류학 분야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는 1980년도에 발행된 어느 식물도감에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식물은 위에 든 산유자나무와는 전혀 다른 식물이다. 이 나무는 제주도의 상록활엽수림지대에서 목재가 썩지 않은 채 묻혀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아주 단단하고 붉은색을 띤다. 지금은 돌문화공원이나 목석원의 전시물로 볼 수 있다. 이 나무는 다름 아닌 조록나무과의 조록나무(Distylium- racemosum)다. 제주어로 조래기낭이 표준 식물명으로 굳어진 사례 중 하나다. 그 이전의 기록에는 모두 산유자나무로 나온다. 어쨌거나 마패 속에 비밀처럼 숨겨진 이 코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새겨 볼 일이다.

<김찬수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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