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 읽는 제주예술사](3)작곡가 안익태가 극장을 찾은 이유

[공간으로 읽는 제주예술사](3)작곡가 안익태가 극장을 찾은 이유
그해 겨울 탐라합창단 탄생 이끌며 그가 왔다
  • 입력 : 2017. 05.23(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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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2월 제주를 찾은 안익태 선생이 제일극장에서 열린 제3회 탐라합창단 음악회를 지휘하고 있다. '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에 실렸다.

재일교포 사업가 김봉학과 인연으로 63~64년 잇단 내도
첫해 1월 제일극장서 열린 탐라합창단 창단에 맞춰 방문
이듬해엔 서귀포관광극장 등 찾아 탐라합창단 공연 지휘

그해 1월 서귀포 지역의 적설이 33㎝까지 달했다. 눈보라와 격랑에 휩싸인 제주는 육·해·공이 완전히 고립된, 말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섬이었다. 도착 못한 여객기가 속출했고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대중교통편이 끊겼다.

하늘이 잠시 개었던 것일까. 1963년 1월 26일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이 항공편으로 제주에 처음 발을 디딘다. 안익태의 제주 방문은 제주출신 재일교포 사업가 김봉학과의 오랜 인연이 계기가 됐다. 안익태의 제주 방문길에 동행한 이도 김봉학이었다.

▶혹한 무릅쓰고 내도 맞춰 맹렬 연습=안익태의 제주 체류 기간은 3일이었다. 그는 이 기간에 음악회와 강연을 펼친다. 1월 26일엔 제주시 칠성로 제일극장에서 열린 탐라합창단 음악회를 지휘했고 이튿날엔 예총제주도지부가 주최한 환영 간담회에 참석했다.

'문화인의 전당'을 표방했던 제일극장은 지금은 건물이 헐려 그 흔적을 볼 수 없지만 당시 '최신 영사기, 완전 방음장치, 개인 의자' 등을 갖추고 관객을 불러모으던 곳이었다. 제주예술제(탐라문화제의 전신) 공연 프로그램이 그곳에서 열렸듯 제주 예술인들에겐 제일극장만한 발표 장소가 없었다.

이날 제일극장 무대에 오른 탐라합창단은 안익태 내도를 계기로 결성됐다. 제주시내 각 교회 합창단원 중에서 최고 실력을 갖춘 멤버를 따로 가려내 모임을 꾸렸다. 이들은 안익태 제주 방문이 다가오자 혹한을 무릅쓰고 맹렬한 연습을 벌였다.

음악회엔 청중 1000명이 몰려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탐라합창단은 안익태의 지휘에 맞춰 베토벤의 '신의 영광', 시벨리우스의 '아름다운 아침' 등을 부른다. 소프라노 원정자와 테너 현종실도 우리 가곡으로 청중들과 만났다.

제주도가 내놓은 '제주문화예술 60년사'(2008)에선 탐라합창단을 제주 최초의 성인합창단으로 소개했다. 탐라합창단 창립 기념 흑백 사진엔 안익태가 가운데 앉은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탐라합창단은 안익태의 방문을 계기로 한층 활발한 활동을 펼치자는 의지를 모은다. 합창단 고문으로 김봉학을 위촉하고 주1회 합창연습과 음악감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탐라합창단은 그해 8월 19~20일 제일극장에서 8·15경축 등의 의미를 담아 또한번 공연을 펼친다. 이때는 소프라노 김미숙 독창 등 20여개의 레퍼토리를 준비했다. 당시 신문엔 탐라합창단을 제주도내 유일의 직장인합창단이라고 썼다.

두번째 제주 방문때 서귀포 공연장소로 알려진 이중섭거리의 서귀포관광극장. 문닫은 극장이었지만 2015년부터 서귀포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으로 다시 활용되고 있다. 진선희기자

▶해설이 있는 음악회로 진행=탐라합창단과 안익태의 만남은 한 차례 더 마련된다. 안익태는 1년여 뒤인 1964년 2월 8일 제주시, 2월 9일엔 서귀포에서 탐라합창단 음악회 지휘를 잇따라 맡는다.

제주시 공연 장소는 첫 방문과 마찬가지로 제일극장이었다. 2월 8일 오후 5시 30분부터 1시간여에 걸친 공연에서 탐라합창단은 '아 목동아', '로렐라이' 등을 선사한다. 해설이 있는 음악회였다. 안익태의 제주 방문을 이끌었던 김봉학이 콘서트 가이드로 나서 한곡 한곡에 얽힌 사연과 작곡가 이야기를 청중들에게 풀어냈다.

서귀포 공연 장소는 1963년 10월 문을 연 서귀포관광극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일극장과 달리 서귀포 공연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자료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2015년 4월 서귀포시 이중섭거리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서귀포관광극장 입구 안내문에 '작곡가 안익태님을 초청하기도 했던' 곳이라고 적어 방문객들에게 그 기억을 전하고 있다.

스무살 무렵에 '서귀읍 최초의 극장'인 서귀포관광극장에서 안익태가 지휘하는 공연을 봤다는 강치균 문화관광해설사는 "탐라합창단에 아는 분이 있어서 구경하러 갔었다"며 "공연 도중에 극장쪽에서 영화 상영 시간이 다가오니 나가달라고 요청해 안익태 선생이 몹시 불쾌해했고 관객들도 황당해했던 일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안익태의 직접 지도를 받았던 탐라합창단이란 이름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비록 그 생명력은 짧았지만 탐라합창단의 활동을 기반으로 1970년대 제주지역에선 민간 중창·합창단이 잇따라 생겨난다. 제주YWCA어머니합창단, 제주 YMCA GLEE클럽, 서귀포의 돌체 칸토 클럽 등이다.

처음 제주땅 밟은 안익태…스페인 섬 마요르카를 보다

1906년 평양 태생인 안익태 선생에겐 첼리스트, 지휘자, 작곡가라는 세개의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후원으로 유명 교향악단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던 그는 1946년 스페인 여성과 결혼하면서 조용한 섬 마요르카에 정착한다.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초대 상임지휘자로 활동하게 된 배경이다.

1963년 1월 안익태 내도 당시 제주지역 문화계 인사들이 공항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제주문화예술 60년사'에 실린 사진이다.

그는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처음 고국 무대에서 지휘봉을 잡는다. 1961년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땐 서울국제음악제를 추진하게 된다. 그는 이듬해부터 3년간 추진위원으로 일했다. 안익태는 이 시기에 제주를 찾았다. 안익태와 제주의 인연은 몇 차례 제주에서 되살아났다.

안익태기념재단은 2012년 11월 제주아트센터에서 '안익태 기념 음악회'를 열었다. 젊은 시절에 첼리스트로 활동했던 안익태의 또다른 모습과 생애 말에 한국적인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들을 소개하는 무대였다. '한국인 안익태'를 부제로 제주도립제주교향악단, 제주합창단, 서귀포합창단이 기념 음악회 무대에 섰다.

제주국제관악제조직위원회는 지난해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관악본을 펴냈다. 조직위원회는 이 곡을 매년 8월 15일 제주국제관악제 경축음악회에서 연주하고 국내외 관악단에 보급하기로 했다.

안익태는 1963년 제주땅을 처음 밟으면서 '지중해의 하와이'로 불리는 마요르카를 떠올렸다. 제주 역시 마요르카처럼 아름답고 경치가 좋아 낙원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두번째 제주 공연을 마치면서 다시 제주에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서울국제음악제에 참석하는 유명 음악가를 데리고 재방문하겠다는 거였다.

하지만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과로가 쌓인데다 1965년 4월 예정된 제4회 서울국제음악제 무산이 가져온 충격으로 병세가 두드러졌다. 그는 1965년 7월 런던 뉴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지휘를 마지막으로 두달 후인 9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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