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녀를 말하다](2)제주해녀 출향 거점지 부산

[한국 해녀를 말하다](2)제주해녀 출향 거점지 부산
日 상인·객주들 모여 시장 형성… '목돈 마련 기회의 땅'
  • 입력 : 2017. 06.08(목) 00:00
  • 고대로 기자 bigroad@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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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도는 일본 식민지 시절 제주도 해녀들의 출어를 위한 거점 역할을 한 곳이다. 사진은 부산 영도의 전경. 강경민기자

일 잠수기 등장 제주 해산물 남획… 1895년 출향 본격화
교통망 타지역으로 이동 수월·현금소득 기회도 매력 작용

항구도시 부산광역시 영도.

제주해녀특별취재팀은 지난 4월 13일 이곳을 찾았다.

일본 식민지 시대 부산 영도는 제주도 해녀들의 출어를 위한 거점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해녀들에게도 한반도 출어의 중요한 거점지이기도 했다.

이곳이 제주해녀 출어의 주요거점이 됐던 이유는 일본의 해조류 상인과 물건을 맡아 팔거나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하는 객주들이 모여 있는 큰 수산시장이 형성돼 있었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이 용이한 교통수단의 발달, 현금소득의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부산의 여러 객주들은 일본으로 우뭇가사리와 같은 해초들을 수출하고 있었다. 1929년 동아일보 보도내용에 따르면 우뭇가사리는 미역의 1000배를 웃도는 가격에 판매됐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도 해녀들은 부산에 본거지를 둔 일본 해조류 상인과 객주에 고용돼 한반도 해안으로 퍼져나가서 해조류 등을 채취하게 됐다.

일본인들이 잠수기를 동원해 제주도 어장의 전복과 해산물을 남획한 것도 제주해녀들의 출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난 1883년 조일통상장정이 체결된 이후 일본의 잠수기들이 제주에 들어와 전복 등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해녀들은 생계에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제주바다에서 수확하는 해산물의 양이 급격히 줄어든 것이다. 초기 1기에 불과했던 잠수기가 1906년에는 300~400기로 증가했다. 잠수기라는 고효율의 어업기계는 자원고갈은 물론 잠재적 유휴 노동력인 제주해녀들의 출향을 가속화 시켰다.

잠수기 어업등장으로 제주의 어장이 황폐화되자 제주해녀들은 1895년부터 경상남도로 첫 출가 물질을 떠났다고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은 기록하고 있다. 이후 해녀들의 출가 물질은 더욱 활발해졌으며 그 범위도 상당히 넓었다. 경상도, 강원도, 다도해, 함경도 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와 오사카, 중국 칭다오, 다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등지로 출가 물질을 나갔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제주 해녀들은 19세기말부터 한반도 남해안 여러지역으로 출향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며, 1910년대 전반에는 2500명, 1910년 말에는 부산, 울산까지 섬 밖으로 나간 제주도 해녀수가 4000명 정도였다"고 설명했다.

# 출향 어떻게

1910년대 제주해녀의 바깥물질은 다양한 형태로 진행됐다. 대표적인 형태에는 객주의 모집에 의한 방법이다. 일본인 무역상들은 객주들을 통해, 그리고 객주들은 다시 해녀 소개자를 통해 제주도 해녀들을 모집했다.

매년 음력 12월경 제주도 각지에서 해녀를 모집해 전도금을 건네주고 계약했다. 봄에 섬을 떠난 해녀들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가기도 하고,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정기선을 통해 일본으로 출어하기도 했다.

독립 출가도 이뤄졌다. 해녀의 남편 2~3명이 공동으로 어선을 매입해 가족, 친척 등의 해녀를 승선시켜 가는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비율은 6대 4정도로 객주의 모집에 의한 것이 많았다고 한다.

제주해녀들은 3월경에 집을 떠나 추석이 가까워 오면 돈을 벌고 제주로 들어왔다. 당시 바깥물질은 가정 경제의 버팀목이 됐고 제주경제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됐다. 구좌·표선·남원·서귀포 등 도내 바닷가 마을들은 마을별로 30명에서 80명씩 해녀들을 모집해 나서기도 했다. 이 같이 바깥물질에 나섰던 해녀들의 일부는 해당 지역에 정착하면서 이른바 '출향 해녀'라고 불리게 됐다.

# 일본 출향

일본으로의 바깥물질은 1903년 미야케지마(三宅島)에서 시작됐다. 이후 제주해녀들은 쓰시마와 고치, 가고시마, 도쿄, 나가사키, 시즈오카, 지바 등지로 진출했다.

제주해녀들은 1922년부터 출항한 군대환(기미가요마루)을 타고서 일본 오사카 등지에서 내린 후 기선이나 철도를 이용해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본과의 직항로 개설은 해녀들의 일본 출어를 가속화시켰다. 일반적으로 제주도 해녀는 기선을 이용해 출향했는데 기선에 의한 일본 본토로의 출향은 쓰시마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오사카를 경유했다고 한다. 1929년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내 해녀 7300명이 약 25만엔을 벌어들인 데 반해 일본으로 출향한 해녀 3500명이 40만엔 정도를 벌어들여 대조를 이루었다고 한다.

특별취재팀=고대로 부장, 강경민 차장, 김희동천·강동민 기자

[전문가 인터뷰]안미정 한국해양대 연구교수(문화인류학)

"제주해녀 출향 일본 제국주의 부산물
日 잠수기 등장은 제주해녀 출향 촉발”


“제주해녀들이 본격적으로 제주섬 밖으로 진출한 것은 식민지 시대였다. 그 이유는 해녀들이 잡는 수산물에 대한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산물을 잡아서 돈을 벌 수 없었는데 일본의 식민지 수산경제하에서 해산물을 통해 돈을 벌수 있게 되자 제주 여성들이 현금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로서 타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4월 14일 한국해양대 캠퍼스에서 만난 안미정 한국해양대 국제해양문제연구소 연구교수(문화인류학·사진)는 제주해녀의 출향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안 교수는 또 제주해녀 이동의 가시적인 요인으로 이전에 없었던 일본의 잠수기 등장을 꼽았다.

“잠수기는 해녀들과 마찬가지로 전복이나 해삼을 채취했으나 잠수기 기술은 해녀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엄청난 채취력을 가지고 있었다”며 “이는 결국 제주어장의 황폐화를 가지고 왔고 출향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1908년 어업법을 통해 잠수기 수를 제한하고 1931년 조선총독부에서 잠수기 조합을 설립해 조업금지 구역을 정하고 한정 대수를 정해 체계적으로 관리를 했으나 제주도 어장은 황폐화의 길을 걸었다.

안 교수는 이어 “당시 잠수기들이 바다에서 채취한 감태와 우뭇가사리는 식용이 아니라 군수·산업원료로 이용됐다”며 “일본 잠수기의 전복 남획과 군수산업의 원료인 감태 대량채취는 식민지 바다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총체적인 파괴를 야기했다"고 말했다.

부산 영도 남항 어촌계의 좌판. 강경민기자

감태는 요오드의 원료이자 화학원료로 사용됐다. 감태에 들어 있는 요오드 칼륨은 진통과 소염제를 만드는 원료일 뿐만 아니라 화약을 만드는데 사용됐다. 일본은 1900년대 초까지 유럽으로부터 질산칼륨을 수입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수입이 어렵게 되자 질산칼륨 대신 요오드화칼륨을 얻기 위해 감태 채취에 열을 올리게 됐고 1984년 미에현 시마군에 요오드 제조공장을 비롯해 통조림 공장을 운영하던 이시하라 엔키치는 일본 농상무성과 육군의 명을 받고 성산포에 한국물산주식회사를 설립해 요오드를 생산했다.

우뭇가사리는 액체화해서 비단 베틀용으로 가장 많이 사용했는데 실을 얽히지 않게 하고 염료 정착에도 사용됐다. 즉 일본의 근대공업을 견인했던 섬유업의 중요한 재료였다. 포항 구룡포가 대표적인 우뭇가사리 어장이었다.

안 교수는 이처럼 제주의 해녀들의 출향은 "개인적으로는 돈을 벌기 위한 경제적 목적에서 이뤄진 것이었으나 이들의 급격한 타지 출어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고대로기자 bigroad@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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