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오름 정상에 올라 발밑으로 펼쳐진 서귀포 전경을 눈에 담고 있는 탐방객들 강희만기자
바람과 새소리… 홀로 아름다운 것은 없다글이나 말이 아닌 눈으로 걷는 이유 느껴
TV에서나 볼 법한 우거진 밀림에 와있는 느낌이다. 숲이 울창하고 깊어 대낮에도 초록의 그림자로 어둑어둑해 겁이 덜컥 날 정도였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깊은 숲의 터널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문득 자연에 취해있는 자신을 목격하게 된다. 적막 속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결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를 벗삼아 한 발 또 걷다보면 불쑥 다시 살아갈 기운까지 얻는 기분이다.
지난 17일 한라일보의 '제5차 2017 제주섬 글로벌 에코투어'는 한라산 자락에 펼쳐진 울창한 숲길을 걷는 코스로 마련됐다. 한라산둘레길에서 출발해 수악~신례천~한라산둘레길~이승이오름~종남천~숲길~표고밭길~한라산둘레길을 거쳐 다시 이승이오름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첫 목적지인 수악을 가기 위해서는 5·16도로변 수악교 인근에 위치한 한라산둘레길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곳에서 200m 정도 걸어가면 수악으로 향하는 경사가 다소 심한 내리막길이 나온다. 잘 닦여지고 평평한 송잇길을 걷다 갑자기 흙으로 된 비탈길을 만나니 현실과는 다른 별(別) 세계 입구로 들어가는 느낌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잇따라 나오는 험한 코스지만 이제 막 피기 시작한 파란색 수국이 참가자들을 위로해준다. 길잡이로 나선 이권성 제주트레킹연구소장은 "이 곳에 핀 수국은 탐라산수국이라고 하는데, 본(本) 꽃이 피기 전에 가짜 꽃(僞花)을 피워 벌들을 유인합니다. 한낱 꽃이라고 하지만 이들에게도 생존본능이 있는 것이지요."
에코투어 길목에서 마주한 나리난초.
숨이 가빠지고 땀이 배어나올 때 쯤 수악 정상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다. 뒤로는 어머니 같은 한라산이 믿음직스럽게 우뚝 서있었고, 앞으로 제지기오름, 지귀도, 섶섬, 칡오름, 영천오름, 문섬, 범섬, 삼매봉, 미악산, 고근산 등 아들 같은 오름과 섬들이 한 눈에 펼쳐졌다. 다만 모자(母子)사이를 갈라 놓겠다는 듯이 중간에 말뚝처럼 박힌 여러 개의 기지국은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멋진 풍경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신례천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날 최고기온이 26℃에 이르는 초여름 날씨를 보였지만 깊은 숲 속에서 햇볕은 발 디딜 틈이 별로 없었다. 덕분에 상쾌한 마음으로 신례천에 도착한 참가자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바위를 골라 편하게 휴식을 취했다.
주섬주섬 오이와 음료수, 간식 등을 꺼내 나눠주는 사람, 코스에서 목격한 희귀식물에 대해 설명해주는 사람, 참가자들 사이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가 이 순간부터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함께 걷는 것 만큼 사람과 친해지기 좋은 수단도 없는 것 같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다음 목적지인 이승이오름으로 향했다. 한라산 둘레길을 따라 걷다보면 나오는 이승이오름은 이승악, 이승이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넓은 분화구 너머에는 사려니오름, 민오름, 큰거린·작은거린오름 등 시원한 풍광이 펼쳐져 글이나 말이 아닌 눈으로 오름에 오르는 이유를 느낄 수 있었다.
한라산둘레길을 줄지어 걷고 있는 탐방객들의 모습.
이후에도 숲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벼락을 맞아 갈라져버린 나무, 덩쿨에 감겨 말라버린 나무 등 고사된 나무가 곳곳에 보였지만, 그만큼 새로 자라나는 나무가 있어 뭔가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깨달음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숲 한 가운데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기로 했다. 어떻게 가지고 왔는지 얼음과 식초를 이용해 오이냉국을 만들고, 숲길에서 직접 채취한 재피를 곁들여 참가자들과 나눈다. 그 사이 참가자들은 서로의 고민거리를 털어놓는다. 자녀 양육, 건강, 인생 등 다양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숲속에서 점심을 먹은 후 강만생 제주세계자연유산위원회 위원장(한라일보 사장)이 추천한 문수현 시인의 '홀로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시를 들으며 잠시 명상할 수 있는 이색적인 시간도 가졌다. 참가자 중 고근미(48·제주시 일도2동)씨가 낭송했다.
'산이 아름다운 것은/바위와 숲이 있기 때문이다/숲이 아름다운 것은/초목들이 바람과 어울려/새소리를 풀어놓기 때문이다/산과 숲이 아름다운 것은/머리 위엔 하늘/발밑엔 바다/계절이 드나드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해와 달과 별들이 들러리 선/그 사이에 그리운 사람들이/서로 눈빛을 나누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숲길은 계속 이어졌다. 경사가 별로 없고 평평한 코스로 구성돼 소화가 저절로 됐다. 자연을 만끽하다 보니 어느새 여섯 시간 넘게 걸린 탐방도 종지부를 찍었다.
한편 오는 7월 15일 진행되는 제6차 에코투어는 산록도로~궤물오름~큰노꼬매 분화구~큰노꼬매 정상~죽은노꼬매~국유림 임도~고사리밭~어음천~큰노꼬매 주차장에서 진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