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녀를 말하다](6)울산광역시 일산동 해녀

[한국 해녀를 말하다](6)울산광역시 일산동 해녀
거대 공장·크레인과 '해녀의 숨비소리’가 부조화속 공존
  • 입력 : 2017. 08.03(목) 00:00
  • 고대로 기자 bigroad@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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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해수욕장에서 물질을 하기 위해 준비중인 해녀들의 모습

감태 높은 빈도 관찰, 수온상승 서식지 이동 확인
해녀 60~70대가 대부분으로 고령화 진행 심각
일부 어촌계 해녀 없어 스쿠버 동원 해산물 채취

우리나라 7대 도시 중 하나인 울산광역시.

인구는 약 120만 명이며, 면적은 1060㎢로(서울의 1.7배 정도) 특·광역시 가운데 가장 넓다.

해안을 따라 들어선 거대한 공장건물들과 골리앗 크레인이 자동차·조선해양·석유화학산업이 집적된 한국 최대의 산업클러스터임을 알려준다.

해녀와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곳에서도 '숨비소리'를 내며 물질하는 제주출향 해녀들을 만날 수 있다.

도구를 이용해 해산물을 채취하는 해녀

지난 3월말 기준 울산시의 해녀는 11개 어촌계·1511명이다. 이 가운데 실제 물질하는 해녀는 500~600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특별 취재팀은 지난 6월 18·19일 동구 일산동어촌계를 찾았다. 일산동 어촌계원 82명 중 해녀는 37명이다. 울산으로 시집을 오거나 남편이 울산에 취직을 하면서 삶의 터전을 옮긴 제주출신해녀가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나머진 제주 해녀에게 물질을 배운 현지 육당해녀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일산해수욕장 앞바다와 대왕암공원 주변 바다이다. 이곳에서 잡은 해산물은 대왕암공원내 대왕암에 있는 해산물판매장에서 직접 판매를 하거나 일산수산물판매센터에 판매하고 있다. 일산수산물판매센터는 울산시 동구청에서 지난 2010년 일산어촌어항 복합공간 조성사업의 하나로 만든 해산물 판매공간으로 이곳이 개장된 후 해녀들은 바다가 허락하면 매일같이 물질에 나서고 있다.

해녀들이 잡은 해산물 포획물량을 저울로 재고 있는 어촌계 직원들

대왕암공원은 신라시대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문무대왕의 왕비가 죽은 후 문무대왕을 따라 호국룡이 되어 울산 동해의 대암 밑으로 잠겼다는 신비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곳으로 하늘을 찌를 듯 1만5000그루의 해송이 솟아있고 해안을 따라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어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제주출향해녀들이 대왕암에서 장사를 하기까지는 숱한 어려움이 있었다.

제주도 하도리 출신인 이옥선 일산동어촌계 나잠회장(울산광역시나잠회 감사)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대왕암공원 아래서 장사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행정에서 장사를 하지 못하게 단속하고 반대를 했다. 60~70년대까지 엄청난 핍박을 받았지만 여기가 전망이 좋고 우리의 삶의 터전이라는 것을 버릴 수 가 없었다. 그래서 고생을 했던 것이고 바다가 마침 우리어촌계 바다이기 때문에 생존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해녀들은 제주도와 달리 어촌계에서 승인하는 날에 한해서 물질을 할 수 있다. 해녀들은 19일 오전 10시30분 일산해수욕장 앞바다로 소라와 해삼 채취 물질에 나섰다. 대왕암 진입 계단 앞 바다로 들어가 안막구지기 해상까지 헤엄쳐 나갔다.

해녀들은 오리발을 차며 물속을 들락날락 반복하고 지친숨을 내몰아 쉬면서 약 5시간 동안 물질했다. 취재팀도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해녀들을 따라 바닷속으로 들어 갔다.

일산해수욕장의 수중생태계

이곳은 제주바다에 비해 수중 탁도가 좋지 않았다. 자갈과 모래와 혼재하는 해저면 위에 크고 작은 암반이 분포하고 있었다. 약 5m 수심에는 감태, 참도박, 잔금분홍잎, 댓잎도박, 두갈래분홍치, 마디잘록이, 갈고리사슬풀, 갈파래류와 같은 다양한 해조류가 저층의 기질이 보이지 않을 만큼 풍성하게 덮여 있었다.

특히 제주에서 주요 바다숲을 이루고 있는 감태(Ecklonia cava Kjellman)가 높은 빈도로 관찰돼 수온상승에 의한 감태의 서식지가 북쪽으로 이동하는 변화 현상이 잘 나타나고 있었다.

작업후 물 밖으로 나온 해녀들의 망사리에는 소라, 해삼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어촌계 직원들은 해녀들이 잡은 해산물을 저울로 재고 확인서를 발급해 주었다. 대왕암에서 장사하는 해녀들은 소라와 해삼을 곧바로 트럭에 실어 대왕암 보관소로 이동했다.

대왕암에 위치한 해산물 판매장 전경.

울산 해녀들의 물질 모습은 10~15년이 지나면 사라질지 모른다. 울산 해녀들의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이곳 해녀들은 60대 후반이거나 70대들이 대부분"이라며 "주전동을 넘어가면 해녀가 없어 스쿠버들을 데리고 와서 해산물 채취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 해녀들만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해양문화는 이곳의 향토유산이며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중요한 문화관광자원이지만 이곳 역시 해녀들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

특별취재팀=고대로 부장, 강경민 차장, 김희동천·강동민 기자

[전문가 리포트-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

성종실록에 제주해녀 울산 이주 기록
70년대 광목으로 만든 옷 입고 물질

제주해녀가 울산으로 이주한 기록은 성종실록(1447년)과 학성지(1749년) , 규합총서(1809년), 경상도 울산부호족대장등에 수록이 돼 있다.

성종실록 262권, 성종 23년 (1462년) 2월 8일에 '근년에 제주 세고을의 인민이 자칭 두독야지(한라산의 별칭)라 하면서 처자들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경상도·전라도의 바닷가 근처에 옮겨 정박하는 자가 수천여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앙관리와 지방토호의 과도한 수탈, 왜구의 빈번한 침입, 과도한 진상, 부역의 증대 등으로 제주도를 이탈하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제주인구는 차츰 감소하기에 이른다. 이에 1629년(인조7년) 출륙금지령이 내려지게 되지만 제주유민은 줄어들지 않는다. 제주도 유민들은 해산물이 풍부하면서 지리적으로도 가까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에 집중적으로 거주했다.

1970년대 초반 고무 잠수복이 들어오기전 이곳 해녀들은 광목으로 만든 잠수복을 입었다. 하의인 물소중이와 상의인 물적삼, 그리고 물수건을 착용하고 물질을 했다. 고무해녀복을 입기 시작한 것은 40년쯤 된다. 제주는 해녀의 물질능력에 따라 상군·중군·하군으로 나누지만 울산의 경우 전복을 채취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두 부류로 나눈다. 전복을 채취할수 있는 해녀는 1등 해녀로 부른다. 얕은 곳에서 성게 ,미역 등을 채취하는 해녀를 개머구리 혹은 운단해녀, 하빠리해녀, 2등 해녀로 부른다. 60~70년대 제주해녀가 많이 올 때는 100명이나 됐다. 각 집의 아랫방과 골방을 얻어서 3~4명씩 함께 생활을 했다. 제주해녀들이 올 때마다 고구마가루와 조 등을 가져와서 밥을 해 먹기도 했다. 그때는 베옷을 입고 물에 들어갔다. 이곳은 해녀가 해산물을 채취한 후 일정비율을 어촌계에 입어료로 지급하고 있다. 해녀들은 어촌계가 승인하는 날에 한해서 물질을 할 수 있다. 이것 역시 제주도와 다른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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