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주년 아픔을 넘어 미래로-1 /제1부 4·3의 현주소] 프롤로그

[제주4·3 70주년 아픔을 넘어 미래로-1 /제1부 4·3의 현주소] 프롤로그
진상규명·명예회복 미흡… 끝나지 않은 진혼곡
  • 입력 : 2018. 01.01(월) 17: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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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0월 31일 라마다프라자 제주호텔에서 제주도민과의 대화를 통해 지난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으로 무고한 희생자가 발생한데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있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 한라일보 DB

불법 군법회의 수형자, 유적지·유해발굴 등 과제 산적
문재인 정부 100대 국정과제 포함 유족 눈물 닦아줘야
본보, 연중기획 통해 현안·미래 과제 등 집중조명 예정

70년 전 제주섬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20만 명이 조금 넘었던 섬에서 약 3만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갔다. 대부분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되거나 정식재판도 없이 사라졌다. 참으로 끔찍한 비극이었다. 그것도 국민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저지른 일이었다. 도민들에게는 '반도' '폭도' '빨갱이'라는 굴레가 덧씌워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제주도민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숨죽여 살아야만 했다. 서슬퍼런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거기다 연좌제로 옭아맸으니 오죽했을까. 그 고통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1948년 벌어진 제주4·3사건은 그렇게 도민들의 삶을, 현대 제주사회를 관통하고 있다.

그로부터 70년이 흘렀다. 제주4·3의 현주소는 어디에 있을까. 군사정권의 서슬과 냉전 이데올로기 탓에 4·3은 암흑의 세월을 보냈다. 반전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21세기를 눈앞에 둔 시점이다. 1999년 12월 4·3특별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마당에 20세기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유족과 도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통했다. 이어 2000년 1월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졌다. 유족과 도민들의 끈질긴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이는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로 이어졌다.

정부는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확정했다. 그해 10월 31일엔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를 찾아 도민들에게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학살 사실을 정부가 인정한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의 잘못을 정부가 나서 청산하고 공식 사과한 것은 4·3이 처음이다. 유족들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유족들로선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순조롭게 이뤄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 정부는 진상보고서를 확정하면서 대정부 7대 건의사항을 제시했다. 제주도민과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의 사과를 비롯 ▷추모기념일 지정 ▷진상보고서 교육자료 활용 ▷4·3평화공원 조성 지원 ▷유가족에 대한 실질적 생계비 지원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 지원 ▷진상규명 및 기념사업 지속 지원 등이다. 국가 추모기념일은 2014년 박근혜 정부 당시 지정됐다.

그렇지만 유족 생계비 지원은 허울뿐이고, 집단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 등은 몇 년 째 중단된 상태다. 국비 지원이 끊기면서 정비사업도 지지부진하다. 그러는 사이 관련 유적지와 현장은 날로 훼손되고 있다. 진상조사보고서의 교육자료 활용 역시 미흡하기만 하다. 4·3사건에 대한 축소왜곡과 편향된 기술로 유족과 도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정권의 입맛에 따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사업이 좌우된 탓이다. 보수정부 시절 4·3을 여전히 이념대립의 산물로 보는 인식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

4·3은 70년이 흘렀지만 현재적 사건인 이유도 이런데 있다. 그동안 일부 진전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갈 길이 멀다. 1세대 피해자인 경우 이제 많은 여생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더 늦어지기 전에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줘야 한다.

지난 해 말 유족회 등이 중심이 돼서 4·3특별법 전면 개정에 나선 것도 그 절박성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오영훈 의원이 대표발의한 4·3특별법 전면 개정안에는 여야 국회의원 60명이 서명했다. 희생자 배(보)상 문제를 비롯 불법 군법회의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등 현안은 적지 않다. 유해발굴과 유적지 보존 정비 등도 정부의 지원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사안들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별법 개정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4·3추념일의 지방공휴일 지정 문제도 시급한 현안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켰다. 그 진정성은 특별법 개정을 비롯 4·3현안에 얼마나 관심과 지원을 보이느냐에 따라 평가될 것이다. 국가 공권력의 잘못으로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만큼 더 늦기 전에 정부가 결자해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부가 나서 희생자와 유족의 억울함과 고통을 어루만지고 위로해야 한다. 유족들이 흘린 눈물을 닦아줘야 할 차례다. 본보는 연중기획을 통해 4·3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 70주년 4·3과 미래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 제주 4·3사건 주요 일지

● 1947년 3월 1일: 3·1절 발포사건 발생

● 1947년 3월 10일: 3·10민관총파업 돌입

●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구역 해제, 4·3사건 종료

● 1957년 4월 2일: 마지막 무장대 생포

● 1989년 4월 3일: 제1회 4·3추모제

● 1989년 5월 10일: 제주4·3연구소 발족

● 1992년 4월 1일: 다랑쉬굴 유해 11구 발굴

● 1999년 12월 16일: 4·3특별법 국회 본회의 통과

● 2000년 1월 12일: 4·3특별법 제정 공포

● 2000년 8월 28일: 4·3위원회 발족

● 2001년 3월 3일: 제주4·3희생자유족회 창립

● 2003년 4월 3일: 4·3평화공원 기공식

● 2003년 10월 15일: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 2003년 10월 31일: 노무현 대통령 사과

● 2004년 4월 20일: 4·3평화공원 1단계 공사 준공

● 2005년 1월 27일: 정부, 세계평화의 섬 지정

● 2008년 3월 28일: 제주4·3평화기념관 개관

● 2008년 10월 16일: 제주4·3평화재단 출범

● 2014년 3월 24일: 4·3 국가 추념일 지정

● 2017년 12월 19일: 4·3특별법전부개정 법률안 국회 제출

※진상보고서 4·3사건 정의: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함.

4·3기획 자문위원



특별취재팀=이윤형 논설위원, 표성준·송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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