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 현장을 가다] (4) 대만 남부의 오래된 도시 타이난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 현장을 가다] (4) 대만 남부의 오래된 도시 타이난
사월초파일 관등 같은 화려함 속 깊어가는 향수병
  • 입력 : 2018. 07.15(일) 19: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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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게 남아있는 안평고보의 성채 벽면이 대남시의 오래된 역사를 말해주는 듯 하다

팽호 떠나 5일만에 대만부로 이동
치열한 네덜란드 교전 후 100여년
녹이문 통해 대만 본섬 입도 추정


제주사람 이방익 일행이 팽호섬을 떠나 향한 곳은 또다른 섬인 청나라 대만부였다. 팽호항에서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움직였는데 날씨가 좋아 순풍에 돛단듯 했다. 그들은 다시 새로운 땅에 다다른다.

"화각(畵閣)이 물 가운데 솟았는데 종소리 북소리가 밤새 들리고 등촉을 셋씩 넷씩 달아놓았는데 사월초파일의 관등인들 이렇게 화려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재화의 풍족함과 인물의 번성함을 보는 것은 처음이며 좌우에 구경하는 사람들의 호사함이 비길 데 없었다."

이방익이 남긴 한글 표류기를 필사한 자료로 보이는 '표해록'은 대만에 발디딘 심경을 그렇게 적어놓았다. 지난 4월 말, 취재팀이 대만 남부 대남(台南, 타이난)시에 도착한 첫 날 도시에서 만난 풍경은 적감루(赤嵌樓)에서 펼쳐지고 있는 별빛 음악회였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으로 꼽히는 적감루는 대만을 점령한 네덜란드 사람들이 행정센터로 사용하기 위해 1653년에 세웠다. 건물 마당에는 명·청 교체기 네덜란드인과 치열하게 싸웠던 '민족영웅' 정성공(鄭成功)의 동상이 환한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녹이문천후궁 입구 건물이 화려하다. 바다의 여신 마조신이 모셔져 있다

이방익이 대남을 찾은 건 그로부터 100여년이 흐른 뒤였지만 역사적 흔적이 배인 도시 곳곳의 건물들은 그 날을 기억하고 있을 지 모른다. 안평고보(安平古堡) 역시 그런 고적 중 하나다. 대만의 역사가 시작된 대남 안평구의 안평고보엔 17세기 중엽 네덜란드 사람들이 만든 '제럴드성'이라는 요새가 있었다. 지금은 보루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반얀나무 뿌리가 타고 오르는 붉은빛 벽돌로 된 장벽만 남았다. 늦은 시간 전망대에 오르면 저 멀리 대만해협에 반짝이는 고기잡이 배들을 구경할 수 있다.

이방익 일행은 팽호를 거쳐 대만 본섬에 다다를 때 어느 곳으로 들어왔을까. '평설 이방익 표류기'의 저자 권무일 작가는 녹이문(鹿耳門)에 첫 발을 디뎠을 것으로 봤다. 그 이유로 녹이문이 대만의 관문이었던 점을 들었다. 권 작가는 "정성공이 네덜란드인을 공격할 때 이곳으로 군사를 끌고 왔고 청나라 역시 정성공을 칠 때 녹이문으로 향했다"며 "중국 남부의 한족들도 녹이문으로 들어와 대만에 정착했다"고 덧붙였다.

녹이문이란 이름이 달린 천후궁을 찾았다. 천후궁 앞마당에선 청년들이 폭죽을 터뜨리며 무술 시연을 하는 등 축제 분위기였다. 1684년 건립된 대남시 대천후궁에선 매년 음력 3월 23일이면 바다의 여신 '마조'의 생일을 경축하는 화려한 잔치를 연다고 하는데 미리 그 장면을 보는 듯 했다.

대만 옛 지도. 팽호섬에서 배를 타고 대만 본섬으로 이동하면 지금의 대만 남부 대남시에 다다른다.

이방익은 '표해록'에서 녹이문·안평고보 같은 곳을 구체적으로 거명하지 않았다. 대신 정조의 명령으로 이방익의 표류에 관한 글인 '서이방익사(書李邦翼事)'를 남긴 박지원의 기록에 대남의 유서깊은 장소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박지원은 이방익과 달리 중국 강남 지역을 방문한 적이 없다. 이방익이 구술한 지명 등을 고증하는 박지원의 시각이 더해진 '서이방익사'는 중국 문헌에 나오는 자료를 참고해 작성됐다.

'서이방익사'에는 녹이문을 두고 "그 모양이 사슴의 귀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며 "양쪽 언덕에 포대를 쌓아 놓았고 바닷물이 해협 사이로 흘러 휘돌아 들어온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방익은 뒤이어 녹이문 안으로 들어가면 수세가 약해지고 넓은 곳이 나와 1000척의 배를 정박해 둘 데가 있고 이곳을 대원항이라고 부른다고 썼다. '안평진성(안평고보)'에 대해서는 "성의 기초는 땅 밑으로 한 길 남짓 들어가고 깊이와 너비도 한두 길이나 된다"며 "성벽 위의 성가퀴는 모두 쇠못을 박았는데 둘레가 1리이며 견고하여 무너질 염려가 없다"고 소개했다.

'저자거리에 오색 유리등을 달아 주야로 불을 켜는' 대만 남부 도시의 이국적 풍경은 한편으로 이방익 일행의 향수를 자극한 듯 하다. 매일 각자 백미 두되, 소전 한냥씩을 받는 등 타지 생활의 궁핍함은 없었지만 고향 생각에 하염없이 누워있는 날들이 늘었다. 표류한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난 때였다. 이방익 일행은 언제쯤이면 조선으로 돌아가게 될까.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교수), 글·사진=진선희기자 >



1710~1884년 중국 표착은 172건
조선 표류민 육로 통해 송환 원칙


이방익 일행은 1796년 음력 9월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지금의 대만, 중국을 거쳐 9개월만에 살아돌아왔다. '일성록(日省錄)'에는 표류민 명단이 상세히 나와있다. 이방익의 고향인 제주 북촌에 거주하는 이은성(李恩成), 김대성(金大成), 윤성임(尹成任), 육촌뻘 되는 이방언(李方彦), 사환 김대옥(金大玉), 임성주(任成柱), 선주인 이유보(李有寶)가 그들이다. 이들 전원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바다의 여신 '마조신'의 보살핌 덕분만은 아니다. 표류민 구조와 송환에 관한 제도가 작동된 영향이 크다.

안평고보 주변 대남시의 옛 거리. 대만 남부 사람들의 일상 생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다.

외교관계 사항을 기록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보면 1710년부터 1884년 사이에 조선 배가 중국에 표착하거나 중국을 경유해 귀국한 건수가 172건에 이른다. 표착지는 만주(滿州)지역이 가장 많았고 강소(江蘇), 절강(浙江), 산동(山東), 복건(福建), 대만 순이다. 1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1년에 약 한차례씩 표류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육로를 통해 중국에서 조선 의주로 송환된 기록이어서 표착한 뒤 항해 가능한 배가 바닷길을 이용해 돌아갔던 사례까지 합치면 실제 건수는 그보다 더 늘어날 수 있다.

이 시기 조선 표류민은 육로를 통해 본국으로 송환되는 걸 원칙으로 했다. 표착지의 역소(役所)에서 전문위원을 파견해 표류민을 북경까지 호송하는 방식이다. 청나라는 사절이 묵는 북경의 회동관(會同館)에 표류민을 수용한 뒤 조선에서 사람이 올 때를 기다렸다가 그들과 동반 귀국하도록 했다. 만일 사절을 보내지 않으면 청조 예부에서 조선통사(朝鮮通事)를 파견하거나 육로로 국경지대까지 송환한 다음 의주의 조선 관원에게 인도한 일도 있었다.

대만부에 이른 이방익을 통해 이같은 송환 일정을 짐작하게 된다.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려 다음 목적지로 갈 거라는 말을 듣고 사자(使者)에게 노정을 물으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대만부로부터 하문부로 가는데 수로로 10일 일정이요, 하문부에서 복주성까지 23일 일정이요, 거기서 황성까지 6800리입니다." 바다 건너 대만과 이웃한 하문에 도착한 뒤 육로로 북경까지 향한다는 걸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방익 일행의 귀환 여정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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