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13)도심 속 녹색마을 오라동

[조미영의 제주마을탐방] (13)도심 속 녹색마을 오라동
구·신제주 연결 완충지대… 개발 붐으로 '상전벽해'
  • 입력 : 2018. 08.06(월) 20:00
  • 조상윤 기자 sych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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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동 전경

20여년간 그린벨트로 묶여 주민들 불편 커
4·3 아픈 역사 간직 속 자연경관·유적 풍부
마을 급변 감안 발전 방향 등 지혜 모을 때



아스팔트가 태양을 머금고 지글거린다. 사방의 콘크리트들은 열기를 내뿜을 뿐, 어느 곳 하나 햇빛이 숨어들 틈이 없다. 이럴 때 커다란 그늘을 드리운 나무 한 그루를 만나면 고맙기 그지없다. 오라동은 그런 곳이다. 회색의 빌딩들 속에서 초록을 품고 흙냄새를 풍긴다. 도심 속 오아시스 같다. 5386세대 1만4217명. 10년 전보다 인구가 3배 이상 늘며 성장했지만 아직도 농업 인구가 20~ 30%를 차지한다. 덕분에 가까이서 농촌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연북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깊은 숲 그늘과 황토빛 흙을 만날 수 있는 이유다.

조설대

오라동은 동쪽으로 도남동과 아라동을 경계로 서쪽 연동입구 해태동산의 남동쪽에 위치한다. 남측 끝이 오라관광지구를 포함한 한라산 끝자락에 다다르니 꽤 넓은 규모이다. 그래서 1955년 오라리에서 오라동으로 개편되며 3개동으로 나뉜다. 종합경기장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위치한 '한내동카름'이라 부르는 오라1동과 사평, 연미, 정실, 동성마을이 포함된 '한내서카름' 오라2동 그리고 연삼로와 서광로가 접해있는 전원마을 오라3동이다.

1973년 개발제한 구역으로 묶여 1999년 그린벨트가 전면 해제될 때까지 오라동은 과거 그대로 멈춰있었다. 덕분에 제주시와 신제주를 오가는 사이에 녹색 완충지대가 생기게 됐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불편은 컸다. 토지의 용도변경은 물론 건물의 증개축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네는 점점 낙후되고 인구가 감소했다. 이후 개발이 풀린 최근 수년간 많은 변화가 생겼다. 공기 좋은 마을로 이주해 오는 젊은이들이 늘면서 오라초등학교의 학생수는 급속히 늘어났다. 공동주택도 부쩍 늘었다. 비좁은 도로와 주차문제 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완급조절을 해야 할 때다. 임시방편으로 도로를 늘려갈 것이 아니라 도로계획에서부터 시민공원까지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잃어버린 마을 '어우늘'.

오라동의 역사는 약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미마을은 문(文)씨가 들어와 살며 마을이 형성됐고, 정실마을은 김(金)씨와 고(高)씨가 정착하며 마을이 조성됐다. 정실에는 아직도 '고씨터'라고 불리는 지명이 있다. 하지만 1948년 4·3사건으로 인해 마을들은 대부분 소실됐다. 중산간 마을들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진 후 마을들이 전부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피난갔던 마을 사람들이 돌아와 복원이 된 곳도 있지만 '어우늘'이나 '선달뱅듸'처럼 영영 사라져버린 마을들도 있다.

특히 오라동은 4·3사건 당시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곳이다. 군과 무장대의 평화협상이 깨지는 계기가 됐던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촬영한 '메이데이' 영상 속 장소가 바로 이 곳 연미마을이다. 마을의 상처를 보듬어 안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시됐다. 그래서 지난 7월 28일 오라4·3길을 개통했다. 오라동의 역사유적지와 함께 4·3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코스를 개발하고 안내판을 만들었다. 1코스는 6.5㎞로 연미 마을회관을 시점으로 조설대, 민오름, 월정사를 탐방하는 코스이고, 2코스는 5.5㎞로 오라지석묘, 고지레, 선달뱅듸를 돌아오는 코스이다.

오라동 망배단은 향토유산 제11호다 원래는 왕의 등극과 붕어 등 국가의례시 절을 하는 단이다. 하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제주의 유림 12명이 집의계(集義契)를 만들어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며 결의를 다짐했던 곳이다. 이후 이곳은 '조설대'라고도 불린다.

민오름은 지역민들의 산책코스로 인기가 좋다. 이곳에 오르면 시내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생채기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쟁을 준비하던 일본군들이 오름 곳곳을 파헤쳐 진지동굴을 구축했다. 18개의 갱도 중 4곳만이 온전하다.

오라동 지석묘는 청동기후기 또는 철기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고인돌이다. 길이 250㎝, 폭207㎝의 규모다. 이 곳 외에도 2기의 고인돌이 더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 외에도 오라동에는 방선문이라는 비경의 계곡이 있다. 영주 10경의 하나인 영구춘화가 유명해 봄이면 선비들이 꽃구경을 위해 몰려들던 곳이다. 이때 새겨 넣은 마애명이 5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2013년 명승 제92호로 지정돼 있다.

이처럼 오라동에는 뛰어난 자연경관은 물론 의미 깊은 유적들이 꽤 있다. 선비마을이라는 자부심이 클 정도로 인물들도 많았다. 한때 정체되는 듯하던 마을이 최근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지금이야 말로 마을 발전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지혜를 모아야할 때이다.

<여행작가>

[인터뷰] 박연호 오라동주민자치위원장 "환경가치·마을번영 해법을"

오라는 제주4·3의 핵심지역이다. 오라4·3길을 개통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4·3운영위원회를 결성해 관리 운영할 예정이다. 현재 약 60명으로 조직됐다. 해설사 교육을 해 방문객들이 요청 시 설명을 해드릴 것이다.

민오름에도 일제강점기 유적인 진지동굴이 남아있는데 이곳 역시 생생한 역사의 현장이다. 안전장치를 마련해 복원한다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본다. 4·3길과 연계될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오라동의 가장 큰 숙제는 오라관광지구이다. 원래 마을 공동목장이었는데 섬문화축제를 계기로 개발의 핫이슈가 됐다. 하지만 20여년간 진척없이 답보상태다. 2013년 결성된 오라동 발전협의회에서는 오라지구의 생산성 있는 발전을 위해 노력중이다. 그러나 매번 무산되고 해법은 찾지 못하고 있다. 환경의 가치와 함께 마을의 번영에도 도움이 되는 해법이 필요하다.

[인터뷰] 송두영 오라동장 "공공재 지원 주민에 도움"

그린벨트가 해제되고 오라동에 많은 변화가 있다. 10년 전에 비해 인구가 3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다보니 여러 문제가 생기고 있다. 특히 인구 증가에 비해 도로가 협소해 불편이 많다. 도시계획도로로 신설이 요구된다.

관내에 시외버스터미널, 종합운동장, 한라도서관, 제주아트센터, 탐라교육원 제주교도소 등 기관들이 많이 있다. 인프라가 늘어난 만큼 그에 걸맞는 여건이 갖춰져야 한다. 이런 기관들이 들어설 때 오라동민들이 공공재적으로 내어준 것들이 많다. 특히 종합운동장이 건립될 당시 헐값에 땅을 내놓았다. 이젠 그분들이 조금이나마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지원을 해드려야 한다고 본다. 행정적으로 풀 수 있는 부분들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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