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8)'층층이 논' 있는 남평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 (8)'층층이 논' 있는 남평
사다리논에서 제주섬 대기근의 아픔 떠올렸을까
  • 입력 : 2018. 08.12(일) 19: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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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시 외딴 마을에서 만난 사다리논. 이방익은 논의 형태는 물론 물을 대는 도구에 관심을 보였다. ·사진=진선희기자

복건성에서 북방 향하던 표류민들
남평현 부근에서 제전 봤을 가능성
"산의 4면을 둘러 논을 만들었는데
강이 멀지 않으면 수기로 물을 댄다"

"복건성에서 북방으로 향하려면 남평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방익 표류 기록을 보니 지금의 남평 시내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청나라 당시 남평에 속했던 지명들이 보입니다."

지난달 10일 중국 복건성(福建省, 푸젠성) 남평(南平, 난핑)시청. 장수원(張水源) 남평시정성공연구회장 등 남평시 역사·문화 분야 연구자들이 220여년 전 이방익의 흔적을 찾아 복건성 북방 도시에 발디딘 제주 방문단과 만났다. 이제야 청나라 때 복건성을 거쳐간 이방익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이들은 미처 드러나지 않은 조선 표류민들의 행적을 퍼즐맞추듯 추리해나가는 등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남평시 도심 명취각에서 내려다본 시내 전경으로 민강을 에워싼 첩첩 산들이 보인다.

▶물을 대는 방법 배우려 했지만 성사 안돼=이방익 일행이 조선 땅인 의주에 귀국했을 때 소지품을 일일이 적어놓은 의주부윤 보고서엔 이방익이 한글로 쓴 언서일기 3건을 갖고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방익이 집필한 자료로 추정되는 한글 '표해록'(권무일 해제)은 연암 박지원의 한문 기록인 '서이방익사' 보다 한층 다채롭다. 한문으로 쓰여진 '서이방익사'가 표류와 송환 노정을 다소 건조하게 기술했다면 표해록은 먼 나라에서 보고 겪은 풍속이 상세하다. 수십 여일만에 복주를 떠나 금사역(金沙驛)에 이르기 전에 마주한 풍경에도 그런 점이 녹아있다. '서이방익사'에는 이 때의 노정을 복주부에 속한 민청현(민淸縣) 황전역(黃田驛), 청풍관(淸風館), 금사일(金沙馹), 남평현(南平縣) 대왕관(大王館), 태평일(太平馹) 순으로 표기했다.

남평은 '어머니의 강'으로 불리는 민강(민江)의 원천인 지역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며 민강이 흐르고 그 주변엔 산이 첩첩이 에워싸고 있다. 이 때문에 남평시 연구자들은 이방익 일행이 지형의 80%가 산인 남평을 지났다면 육로가 아닌 뱃길로 강을 따라 이동했을 것으로 여겼다. 장수원 회장은 도심 7층 높이에 자리한 명취각(明翠閣)에 올라 "이방익이 강을 건너 갔다면 이 사찰을 봤을 것"이라고 했다.

우계연합제전으로 향하는 길에 밭농사를 짓고 있는 농부들을 만났다.

제주섬 대기근 직후 표류한 이방익이 남평 주변에서 목격한 건 제전(梯田)이었다. 제전은 우리나라 남해의 '다랑이논'처럼 비탈에 층층으로 일구어 사다리 모양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계단식논과 밭을 총칭한다. 조선시대 농서(農書)에는 중국의 영향 때문인지 제전이란 용어가 종종 나온다.

"청초와 회화나무가 무성하지만 강남은 사람이 많고 전답은 적어서 산의 4면을 둘러 층층이 논을 만들었는데 이상하여 물어보니 논이 아무리 높아도 강이 멀지 않으면 수기로 물을 댄다고 했다. 그 방법을 알면 우리나라에 묵혀둔 땅이 있겠는가? 실정을 배우고 싶지만 할 수가 없었다."

▶사계절따라 바뀌는 아름다운 신세계=인류는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농업에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왔다. 평지와 달리 산지에 위치한 사다리논은 그같은 노력으로 탄생했다.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토지를 효율적으로 일궈온 옛 사람들의 땀이 배어있다.

2017년 8월 기준 10개 시·구 인구 321만의 남평시는 오랜 역사 못지 않게 농업과 임업 자원이 풍부하다. '복건성의 곡물 창고'라고 하는데 이방익이 이국땅에서 본 사다리논은 그 별칭을 만든 농업 자원 중 하나다.

제주 방문단의 일원인 '평설 이방익 표류기'의 저자 권무일 작가가 표해록에 적힌 '층층이 논'을 볼수 있냐고 묻자 남평시연평구판공실의 락애주(駱愛珠) 주임이 흔쾌히 안내자로 나섰다. '중국 대나무의 고향'이라는 남평의 또 다른 별명처럼 도심을 출발해 빽빽한 대숲이 군데군데 있는 가파른 길을 차를 타고 2시간 넘게 달렸다. 마주오는 차들이 빠져나가기 힘들 만큼 좁은 도로 아래는 낭떠러지였다.

마침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다리논은 지명을 딴 '우계연합제전(尤溪聯合梯田)'이었다. 안내판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열개의 제전 중 하나로 중국 안에서는 다섯손가락안에 든다는 글귀를 써놓았다. 중국중요농업문화유산으로 '아름다운 신세계'인 제전에 들어가면 곳곳에 푸른 대나무가 심어져 있고 진흙집에 밥 짓는 연기가 어울린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고 했다.

7월의 사다리논은 벼가 자라고 있어 온통 초록이었다. 8월엔 반(半)이 황금색이고 반이 초록색으로 변한다. 9월엔 황금 물결이 된다. 사다리논은 농민들에게 치열한 생활의 현장이지만 외지인들에겐 더러 낭만이 된다. 한 폭의 산수화처럼 계절마다 다른 빛깔을 띠는 제전을 담기 위해 중국 안팎에서 사진가들이 모여든다.

이방익이 제전을 본 계절은 봄이다. 물을 대는 수기란 표현이 나오기 때문으로 실제 3월부터 5월까지 사다리논에 벼심기 작업이 진행되고 그 기간에 물대기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연합제전 지역에서는 이방익이 말한 수기를 찾기 어려웠다. 대신 마을 사람들은 어릴 적 쌀을 찧는 정미 도구로 수차를 사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글=진선희기자

가뭄에 타격 큰 벼농사 해결법
표류기에 중국 수차 잇단 등장

정조가 통치하던 1792년부터 1795년까지 제주섬은 임을대기근을 겪었다. 이로 인해 제주 인구의 23%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니 그 참혹상을 짐작할 수 있다. 김만덕이 전 재산을 내놓아 제주도민을 구휼했던 시기가 임을대기근 때였다.

1796년 표류한 이방익도 고향의 아픔을 모르지 않았을 터, 복건성을 경유하면서 논에 물을 대는 기구인 수기에 관심을 보인 건 우연이 아니다. 놀리는 땅 없이 수기를 이용해 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전답을 일궜으면 하는 바람이 컸는지 모른다.

농업에서 수리(水利)는 토지의 생산성을 높이고 농민들이 안정적으로 곡물을 수확할 수 있는 기술로 조선에서는 일찍이 그 중요성에 주목했다. 뜻밖의 견문기인 표류기에도 중국 수차(水車)에 대한 기록이 적지 않다. 이방익 표해록에는 '수기'란 표현을 썼는데 이 역시 수리 시설로 추정된다.

1488년 중국에 표류했던 최부는 절강성 소흥부를 지날 때 수차를 이용해 논에 물을 대는 농부를 본다. 최부는 호송관에게 수차 만드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거듭 간청한다. 호송관은 최부에게 수차의 제작 원리와 이용방법을 하나하나 알려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유구국(琉球國)에 표류했다가 1546년 송환된 박손 등 제주사람 12명이 귀국 길에 복건(福建)의 수차를 보고 그 제도를 상세히 익혀 돌아왔다는 대목도 있다. 조선 정부에서는 이같은 정보에 따라 수차를 만든다면 물을 퍼올리기에 매우 편리할 거라며 이를 제작해 각 지방에 내려보내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자는 내용이 나온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수차 보급을 통해 가뭄이 들면 타격이 큰 벼농사에 도움을 주려 했지만 정조 때까지도 어려움이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조 22년(1798) 실록에는 "한번 수재나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입을 것이나 먹을 것이 모두 떨어지게 되는데 이는 사람이 제 할 일을 다하지 못하고 지리를 다 이용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며 "수차는 가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수레는 두 사람 몫의 일을 하기 위한 것이며, 대바구니는 곡식을 저장하기 위한 것이고, 방아는 곡식을 찧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를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하였다"고 적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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