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와 함께] 세번째 시조집 강상돈 시인

[저자와 함께] 세번째 시조집 강상돈 시인
"느릿느릿 뚜벅뚜벅 삶의 정점 향해"
  • 입력 : 2018. 10.04(목)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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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아픔서 현실문제까지
달팽이·담쟁이 연작에 집약

"누구인들 상처 없었겠는가"


돌하르방이 좌우로 서있는 계단을 올라 제주도민속자연사박물관 입구에 서면 유리벽에 한 편의 시가 박혀있다. '이곳에선 멈춤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빗장을 연 정주석이 긴 안부를 물어오고/ 바람이 건네준 밀어 오늘 또 꺼내 읽는다'. 한 해 수십 만명이 찾아드는 박물관에 내걸린 시편을 쓴 주인공은 강상돈 시조시인이다. 이곳에 근무하며 청사 방호 업무 등을 맡고 있는 그가 '민속자연사박물관에서'란 시로 오래된 공간에 문학의 숨결까지 불어넣고 있다.

강 시인이 이 시를 포함 신작을 모아 세번째 시조집 '느릿느릿 뚜벅뚜벅'을 냈다. 여느 시집처럼 수록시에서 뽑은 표제가 아니라 60여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어휘를 썼다. '담쟁이'와 '달팽이' 연작에 드러나듯 서두르지 않고 삶의 정점을 향해 나아가려는 시인의 마음을 집약해놓은 말이다.

'달팽이 1'에서는 '느릿느릿 가는데 무슨 욕심 더 부리랴// 집 한 채 있으면 그걸로 만족한데// 축축한 봄날이 오면 느림보로 살고 싶다'고 한다. '담쟁이 27'에는 '해고의 칼날 앞에 숨죽이며 살지만// 꿈 하나 일궈가면서 뻗을 만큼 뻗어간다'는 꿋꿋함이 보인다.

5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그가 해탈하듯 '달팽이 철학', '담쟁이 철학'을 꺼내놓는 건 그간 겪어온 여러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도시의 가을' 편으로 묶인 10여편에 그 아린 기억이 배어난다. 서귀포에 첫 일터를 잡고 첫발 떼는 아이처럼 설레는 출근길을 이어가다 한 순간에 직장을 잃었던 일은 '돌아보면 누구인들 아픈 상처 없겠는가/ 계약동거가 끝난 도시의 한복판에서/ 단 한번 휘두른 칼날 핏발마저 곧게 선다'('도시의 가을')란 시조를 낳았다.

하지만 그의 시편은 개인적 아픔에만 머물지 않는다. 곤을동, 큰넓궤 등 시인의 시선은 어느 새 제주 4·3의 현장에 다다른다. 그곳에서 시적 화자는 난데없는 군홧발소리, 총성 같은 꿩소리에 흠칫 놀란다. 어느 순간엔 굴 속으로 숨어들었던 70년 전쯤 그 마을 사람들이 되어 벌벌 떨며 겨울 속을 걷는다.

제목만으로 지난 국정농단 사태가 떠오르는 시조들도 줄을 잇는다. 시집의 말미를 채우고 있는 '신발', '7시간의 비밀'이 대표적이다. 이 땅에 단단히 발붙인 현실 인식을 통해 시조의 새로운 서정성을 탐색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5년 만에 새 시조집을 낸 강 시인은 "딱히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다"면서 "튼실한 생명 하나만이라도 건지기 위해 뚜벅뚜벅 내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했다. 열림문화. 1만원.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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