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민족·인류 사랑한 사상가
학력보다 실력 중요 실제 모델분단 전 남북연구 성과도 주목
"석주명 선생님은 나비전문가를 넘어 자연, 인문, 사회의 다양한 분야를 두루 섭렵한 통합학자였고,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민중, 민족, 인류를 사랑한 사상가였습니다."
지난 12일 제주대에서 열린 석주명(1908~1950) 탄생 110주년 기념 '석주명의 삶과 학문세계' 전국학술대회. 제주학회장인 윤용택 제주대 교수는 이같은 개회사를 준비했다. 인문·자연과학을 넘나들며 짧은 생을 살다간 고인의 업적을 살펴본 이날 석주명의 삶과 사상을 조명해놓은 한 권의 책이 도착했다. 윤용택 교수가 쓴 '한국의 르네상스인 석주명'이었다.
윤 교수는 25년 전 이병철의 '석주명 평전'을 읽고 석주명을 사모하기 시작했다. 석주명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산을 오른 산악인이면서 한국 최초로 방언 사전을 펴낸 국학자, 국제어인 에스페란토 보급에 휩쓴 세계평화주의자, 나비를 쫓아 한반도 곳곳을 누빈 곤충학자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만돌린과 기타를 잘 쳤고 제주민요 '오돌똑(오똘또기)'을 채보했다.
제주학회가 석주명을 주제로 다룬 데서 알 수 있듯, 제주와 석주명의 인연은 깊다. 석주명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개성 생약연구소 연구원으로 서귀포의 제주도시험장에 파견근무하며 제주의 자연과 문화를 연구했다. 우리 문화의 본 모습을 보려면 그 원형이 남아있는 제주를 알아야 한다며 '제주도 방언집' 등 6권에 이르는 제주도 총서를 남겼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을 때 제주도의 가치를 깨닫고 숱한 자료를 수집해 세상에 알린 이가 석주명이다.
하지만 윤 교수는 "석주명을 모르는 이도 거의 없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이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탄생일(1908년 10월 17일)이 1908년 11월 13일로 잘못 알려졌고 숭실학교에서 송도고보로 옮기는 과정도 불분명하다. 최종학력은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 농학과인데도 박물학과로 사실과 다르게 전해져왔고 사망 이유도 확실하지 않다. 저자는 '숭실 100년사' 등 갖은 자료를 뒤지며 묻혀있던 사실들을 꺼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석주명의 존재는 '나비박사'로 묶어두기 아쉬울 만큼 더 크게 다가왔다. 석주명은 정규대학이 아닌 고등농림학교를 나왔고 대학교사가 아닌 중등교사였지만 노력과 실력으로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다. 윤 교수는 이를 두고 그가 학력보다 실력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실제 모델이라고 했다. 석주명이 분단 이전에 남북을 두루 탐사하고 연구한 점은 통일로 가는 시대에 남북 학자들의 교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궁리. 2만원. 진선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