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
  • 입력 : 2019. 03.20(수)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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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2. 청춘들의 우격다짐



노을이 아름답게 구름을 물들이는 하늘에 갈매기 서너 마리가 한가롭게 날아다녔다. 파도가 밀려왔다 살며시 부서지는 해운대 해변 위 도로를 스쿠터가 달렸다. 청년은 핼멧도 없이 안동장이란 붉은 글씨가 선명한 철가방을 매달고 휘파람을 불며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삽화=고재만 화백

이국적인 모습의 젊은이는 등치가 컸지만 王金山(왕금산)이란 이름표가 달린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큰 건물을 돌아 골목길에 막 들어섰을 때 불량기 넘치는 네댓 명의 패거리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스쿠터를 막아섰다.



감히 누가 내 앞길을 막아서?
금산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날아올라 사내를 옆차기로 넘어뜨렸다





패거리 중 한 명이 각목을 든 손을 길게 뻗으며 앞으로 나섰다.

"일단 정지."

스쿠터는 멈출 듯 하더니 재빠르게 핸들을 돌려 뒤돌아가려했다. 그러자 패거리들이 재빨리 막아서며 발길질을 해댔고 금산은 스쿠터와 함께 쓰러졌다.

"야, 이 짱꿰 새끼야. 어딜 도망 쳐."

"저 새끼 어제 토낀 놈 맞아. 안동장."

금산은 일어서며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긴 사내가 침을 찍 갈기더니 주먹을 쥐고 위협적인 자세로 다가섰다.

"야, 뭘 꼬나봐 이 뙤놈의 새꺄?"

금산은 눈을 부릅뜨고 칠 테면 쳐보라는 듯이 마주섰다.

"너희들 뭐꼬? 와 일하는 사람 방해 하노?"

"야 임마, 우리 구역에서 돈 벌면 통행세는 내야 할 것 아냐?"

"짱꿰 새끼야 세금 바치라고."

금산은 싸우지 않으려고 흙이 묻은 교복을 털면서 그들의 시선을 피했다.

"우리 사장 세금 꼬박꼬박 잘 내고 있다. 그만 하자."

각목을 든 사내가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철가방을 내리쳤다.

"이 짱꼴라 새꺄. 아직도 한국말 몰라?"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배달통이 찌그러졌다. 금산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히 누가 내 앞길 막아서?"

말을 마치기도 전에 금산이 날아올라 각목을 든 사내를 옆차기로 넘어뜨렸다. 패거리들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애초에 금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 명 씩 제압해 나가는데 지나가던 순찰차가 이들의 싸움을 발견하고 경고음을 울리며 멈춰 섰다.



권용찬이 왕 씨 가족들을 만난 건 시골에서 제주시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였다. 당시 용찬은 어머니가 구해준 동향 출신 장석규 씨 집에 셋방을 얻고 자취를 하고 있었다.

해녀인 어머니는 바다에서 채취한 톳, 청각, 미역이나 전복, 해삼, 소라 등 싱싱한 해물들을 정기적으로 주인집에 납품했고, 사글세 대신 장 씨 집안의 허드렛일을 도와주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집주인의 부친 장동철 씨는 토지와 건물을 많이 가진 부자였는데 대룡반점도 아들에게 넘겨주기 전에는 그의 것이었다. 대룡반점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물건이 있었다. 사람들이 잘 보이는 벽면 유리 진열장 안에 기름칠 잘 된 웍과 도마 칼이 보관 되어 있었다. 그 아래 붙은 설명서에는 '대룡반점의 창업주 왕치관 씨 부친이 중국에서 직접 만든 가보'라고 적혀 있었다. 중앙 벽면에는 붉은 색 바탕에 황금색으로 '克苦耐勞(극고내로)'라 쓰인 액자도 희뿌연 먼지를 뒤집어쓰고 걸려 있었다.

대룡반점은 주변의 관공서 사람들이 단골 고객이었지만 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주말이면 축구 좋아하는 학생들끼리 모여 내기 시합을 하고 들리는 곳이 대룡반점이었다.

그런데 용찬이 짜장면을 공짜로 먹게 된 것은 왕 씨 집안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시내에 오면 꼭 용찬을 대룡반점으로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사주었다. 그날도 어머니와 함께 대룡반점에 갔는데, 여자 주인이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하는 어린 딸을 야단 치고 있었다.

"아이 정신 사나워. 그거 좀 꺼. 너 맨날 노래만 부르면서 이러고 어떻게 중학교 간다고 그래?"

딸애는 워크맨의 스위치를 끄며 당찬 표정으로 대들었다.

"왜 못가? 부산 보내줘.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되잖아?"

"밤낮 서태진지 동태진지 노래만 부르는데 무얼 믿고 육지에 보내냐구?"

그 말에 용찬을 힐끗 바라보더니 딸은 당차게 대들었다.

"엄마, 오빠들은 갔는데 왜 난 안 된다는 거야? 은산이 오빠도 공부 못 했잖아? 부산 고모도 오랬단 말이야. 난 갈 거야. 안 보내주면 도망이라도 간다구."

말을 끝낸 딸은 워크맨을 낚아채고 휭하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리화야. 아니 저것이?"

그때 조리실에 붙은 음식 배출구에서 '짜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리화 어머니는 짜장면 한 그릇을 쟁반에 받쳐 들고 오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에고, 어린 것이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상황을 지켜보던 용찬의 어머니가 빙그레 웃으며 응답 했다.

"따님이 예쁘게 생겨서 얼굴값 하겠네요."

리화 어머니가 식탁 위에 음식을 내려 놓으며 용찬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다 저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아드님은 참 똑똑하고 착하게 생겼네요."

리화 어머니는 쟁반을 옆 식탁 위에 놓고 의자에 걸터앉아 용찬의 모친과 담소를 나눴다. 용찬이 짜장면을 골고루 잘 비비고는 입가에 잔뜩 흔적을 남기며 정신없이 먹고 있는 사이 몇 마디 얘기가 오고가더니 흥정이 이루어졌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의 선생님이 되었다
학생 신분에 선생님 소리가 남사스러워 오빠라 부르라고 했다





주말에 한 번씩 용찬이 리화의 공부를 도와주면 언제든지 짜장면은 공짜고 용돈도 주겠다고 했다. 어머니가 의향을 물었지만 용찬은 쑥스럽다고 한발 물러섰다가 리화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승낙을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초등학교 6학년 어린이의 영어, 산수 선생님이 되었다.

리화는 '선생님', '선생님'하며 잘 따랐다. 헌데 용찬은 학생 신분에 선생님 소리가 남사스러워 그냥 오빠라 부르라고 했다. 여동생이 없는 용찬은 리화가 마냥 귀여웠다.

용찬은 야간 자율학습이 있어서 식당이 문 닫는 저녁 늦게 귀가했기 때문 그 좋아하는 짜장면을 자주 먹지 못했다. 그러나 토요일 오후 교습이 끝나면 리화 아버지는 짜장면에 군만두, 때로 탕수육도 만들어 주었다.

리화는 적극적인 성격이어서 용찬이 가르쳐주는 것을 곧잘 이해했고, 내주는 숙제는 열심히 풀어왔다. 리화의 성적은 금세 쑥쑥 올라갔다. 시험 본 날은 자랑하고 싶어 동그라미가 그려진 시험지를 들고 늦은 밤까지 자취방 앞에서 기다렸다. 용찬도 보람을 느끼며 뿌듯해 했다. 성적이 오를 때마다 리화의 부모는 두둑하게 용돈도 주었다.

리화는 화교 3세지만 의식은 한국 학생과 다름없었다. 여느 한국 소녀들처럼 아이돌 그룹을 좋아했다. 용돈이 생기면 테이프는 물론 브로마이드를 구입해 자기 방을 도배했다.

리화는 틈만 나면 자신의 노래 실력을 뽐냈다.

"오빠, '서태지와 아이들' 멤버 이름 다 알아?"

용찬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시골서 갓 올라온 촌놈은 음악에 관심 둘 기회가 없었다. 부잣집 아이들은 마이마이다, 워크맨이다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도구들을 가지고 다니면서 음악을 즐겼지만 용찬은 그럴 형편이 못됐다.

"이 오빠가 리더 서태지고, 이 오빤 이주노, 그리고 요 오빠가 양현석이야."

그는 브로마이드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멤버들을 소개했다.

"작년에 방송국 모든 음악상을 휩쓸었어. 오빠 이 노래 들어 봐. 최신 나온 '하여가'란 노랜데 아주 재미있어."

리화는 워크맨을 틀어놓고 율동까지 하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어린 애의 입에서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가사가 나오는 것이 생경했지만 사실 용찬은 그때 리화 덕에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다수의 중국음식점이 그렇듯 공무원을 상대하는 대룡반점은 점심시간이 대목이었다. 리화의 가정집은 대룡반점 맞은편에 있었다. 헌데 어느 날, 용찬이 리화의 집으로 들어서려는데 대룡반점 안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열린 문 안으로 언뜻 리화의 모습도 보였다. 토요일인데도 손님이 가득했다. 용찬은 무슨 일인가 궁금해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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