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6) 한산사와 금산사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6) 한산사와 금산사
달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한밤중 종소리 객선까지 들리네
  • 입력 : 2019. 09.10(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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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사를 떠난 이방익 일행
소주 대표적 사찰 한산사로
호구사와 비교 웅장함 기록
장계 시 ‘풍교야박’으로 유명


사찰 내부는 온통 시인 장계(張繼)가 쓴 시로 뒤덮여있었다. '풍교야박(楓橋夜泊)'이다. '달 지고 까마귀 우는데 하늘엔 서리 가득(月落烏啼霜滿天)/ 강가 단풍나무와 배의 등불 바라보다 시름에 겨워 잠드는데(江楓漁火對愁眠)/ 고소성 밖 한산사(姑蘇城外寒山寺)/ 한밤중에 울리는 종소리 객선까지 들려오누나(夜半鐘聲到客船)'란 시의 구절이 탁본이나 빗돌에 새겨져 곳곳에 놓여있었다.

소주의 대표적 사찰인 한산사를 찾은 관광객들이 추억을 남기고 있다.

장계는 당나라 때인 753년 진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관리 임명을 결정짓는 전형에서 떨어져 귀향하던 길이었다. 한산사 입구 풍교 아래 배에서 밤을 새운 장계는 고소성의 불빛을 바라보며 처량한 마음을 시에 실었다. 중국인들 사이에서 이 시를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한다. 시에 읊어놓은 한산사는 널리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었지만 소주에 들렀던 장계가 남겨놓은 이 시 덕분에 유명해졌다. 시의 한 대목처럼 깊은 밤 한산사에서는 지금도 종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산사 경내에 세워진 장계의 시 '풍교야박'을 새긴 빗돌

이방익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한글 '표해록'에도 한산사가 나온다. 청나라 시절에도 한산사는 이미 이름난 사찰이었던 듯 하다. 이방익은 호구사 가는 길에 동행했던 왕공에게 제안한다. "우리 만리 밖 사람으로 천우신조하여 이 땅에 이르러 천하승경을 다 보고 가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올 때 한산사를 지나 바로 호구사를 보았으니 가는 길에 한산사를 봄이 어떻습니까?" 왕공은 그 말을 기다렸다며 이방익에게 답한다. "내가 잊고 말을 못하였는데 가는 길에 한산사를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호구사를 떠나 한산사 앞에 배를 매고 절문으로 들어간다. 이방익은 호구사와 비교해 한산사의 인상을 적어놓는다. "이 절은 평지에 지었지만 웅장함은 호구사와 마찬가지이고 누른 기와로 이었으며 단청이 찬란하지만 금탑은 없었다."

한산사 곳곳에는 '풍교야박'을 여러 글씨체로 써놓은 작품을 볼 수 있다.

한산사는 소주의 풍교진(楓橋鎭)에 있다. 6세기 초에 세워졌다. 당나라 때 기행을 일삼던 한산과 습득이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본래 명칭은 묘리보명탑원(妙利普明塔院)이다. 지금 남아있는 건축물은 대부분 청나라 시기의 모습이라고 했다. 이곳에는 근래 음력이나 양력 설마다 종을 108번 울리는 행사가 진행된다. 그때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데 소주시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이방익의 발자취를 따라나선 탐방단이 한산사에 도착했을 때도 사찰 입구부터 방문객들로 빼곡했다. '풍교야박' 시구가 적힌 빗돌 앞에서 사진을 촬영하며 추억을 남기거나 연못을 유영하는 물고기들을 보며 봄날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금산사 꼭대기에 오르면 사찰 건축물 너머로 시원한 풍경이 안겨온다

'풍교야박'이 쓰여지던 무렵의 종은 명나라 초에 절이 소실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로 1522~1566년 명나라 가정제에 새로 주조했는데 '평설 이방익 표류기'의 저자 권무일 작가는 이방익은 아마도 그 시기에 만들어진 종을 봤을 것으로 추정했다. 현재 한산사에 있는 종은 청나라 말기에 제작됐다.



높이 100여장 석산은 어디?
“금산사 세워진 금산 아닐까”



1797년 음력 4월 25일 이방익 일행은 소주를 떠나 양주(楊州) 강도현에 이른다. 그가 이번에 발디딘 곳은 진강(鎭江)에 있는 금산사(金山寺)다.

"가운데 석산이 있는데 높이가 100여 장이요 둘레가 3~4리나 되었다. 돌기둥을 가로 끼어 세우고 돌을 다듬어 마루를 놓고 30여 간 집을 그 위에 지었는데 이는 금산사라는 절이었다. 풍경 14개를 절 4면에 달고 목인(木人) 14개를 만들어 종경 곁에 세웠는데 법당 위에서 목인이 때를 기다려 머리로 풍경을 받아치면 남은 목인이 차례로 받아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가 청아하여 막대로 치는 것이나 다름이 없어 조금도 시간을 늦추지 않으니 그 조화가 신기묘묘하였다."

금산사 계단을 오르는 방문객들

이방익이 '표해록'에 써놓은 금산사의 풍경이다. 청나라 시절 중국 4대 명사 중의 하나였던 금산사는 강남 지역의 불교성지로 통한다. 그가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표해록'의 금산사 기록은 비교적 짧지만 이방익의 구술을 토대로 작성된 '서이방익사'에는 연암이 전해 들은 이야기가 그보다 길게 서술되어 있다. 일부를 옮겨본다.

"금산사는 오색의 채와(彩瓦)로 지붕을 덮었으며 절 앞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는데 높이가 백 길은 됨직하고 섬돌을 5리나 빙 둘렀으며, 이층 누각을 세웠는데 아래층은 유생 수천 명이 거주하면서 책을 파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고 위층에는 노랫소리 피리소리가 하늘을 뒤덮었으며,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잡고 열을 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석가산 위에는 십자형의 구리기둥이 가로놓이고 석판으로써 대청을 만들었으니 바로 법당이었으며, 또 종경(鍾磬) 14개가 있는데 목인이 때에 맞추어 저절로 치게 되어 있어 종 하나가 먼저 울면 뭇 종이 차례로 다 울었습니다."

청나라 강희황제가 금산사에서 바라본 장면을 보고 감동하며 썼다는 '江天一覽(강천일람)'.

연암은 구술에 더해 손수 찾아낸 문헌을 바탕으로 금산사에 얽힌 사연을 보충해놓는다. 곽박을 장사 지낸 곳으로 전해지는 산 아래 두 개의 바위, 맛이 매우 달고 찬 중냉천(中冷泉), 비라각 남쪽 묘고대(妙高臺) 등이다. 탄해정, 유운정 두 정자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강의 물결이 아득하고 날아갈 듯 정신이 상쾌해진다며 소동파의 시도 인용했다.

그로부터 220여 년 뒤 탐방단이 찾은 금산사는 사찰 입구 '금산' 편액으로 그 존재를 알렸다. 옛 모습은 희미했지만 계단을 오르고 올라 꼭대기에서 바라본 경치는 이방익이 봤을 그대로인 듯 했다. 권무일 작가는 이방익이 표현한 석산, 연암이 적어놓은 석가산이 바로 금산이라는 의견을 냈다. 금산사 뒤편으로 가서 산의 형상을 본 권 작가는 "돌을 켜켜이 쌓은 다음 흙을 다져 올렸고 다시 그 위에 돌을 쌓은 인공산 즉 석가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소주나 양주는 대부분 토사가 퇴적된 땅이어서 구릉같은 낮은 산이 있거나 운하를 판 흙으로 쌓은 인공산이 많다. 그래서인지 강이나 호수에 있는 작은 섬들을 산이라 표현한다"고 말했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글·사진=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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