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대형서점에서 '한국'을 찾기가 참 쉽지 않다. 서고 한 두 개는 일본이 차지하고, 그 옆 아시아문학 서고 한 구석에 한국 소개 책자들이 많으면 열댓 권, 적으면 한 두 권 꽂혀 있다. 물론 한국 관련 중문서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문학번역원 덕분에 웬만한 문학작품 가운데 중국에서 번역출간된 것이 적지 않다. 최인호의 '상도商道'가 한 때 인기를 끈 적도 있고,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경우 맨부커 상을 받고 얼마 후 중문판이 나왔다. 절망이 나를 단련시킨다는 부제를 단 '박근혜자서전' 중문판은 얼마나 뿌렸는지 작은 서점에서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항시 서고에 꽂혀 있는 책은 여전히 소략하기 그지없으니 내가 직접 본 바에 따르면 한중수교 이래 크게 변한 것이 없다. 어찌 이러한가?
발해국(渤海國).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는 정작 발해국을 역사에서 누락시켰다.
대중의 관심이 없으니 그러하다. 왜 관심이 없는가? 예전에 자신들의 속방이었고, 유교의 이념을 그대로 따르며, 불교를 똑같이 숭상할뿐더러 스스로 소중화小中華라 여기고 있으니 무슨 차이가 있을 것이며, 어떤 구별이 있겠는가? 차이가 없으니 관심이 없고, 구별이 안 되니 호기심 또한 없을 수밖에. 우선 한국에 대한 중국인의 시선을 살펴보고 중화와 소중화를 통해 몰이해의 단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조선왕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다?
위만조선·한사군 등 허황된 시각
김부식 '삼국사기' 단군왕검 배제
중국인들이 한국, 특히 한국사를 접할 때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예외 없이 기자조선箕子朝鮮과 위만조선衛滿朝鮮, 그리고 한사군漢四郡이다.
어느 것이 기자의 묘인가? 하북성 기자묘. 기자가 분봉받은 기국(箕國)은 하북성에 있다.
평양의 기자총
'사기·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는 주 무왕이 기자에게 조선을 봉지로 주고 신하로 대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그가 옛 은나라 도읍지를 지나며 지은 시라며 '맥수지탄麥秀之嘆'이란 고사의 출처인 '맥수지시麥秀之詩'를 소개하고 있다. 기자가 실제로 은나라 말기에 살았다면 대략 기원전 11세기쯤일 것이니 기원전 2333년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개국하고 1200여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사마천은 전설상의 오제五帝를 본기本紀에 넣어 실제 역사로 만든 것처럼 오래된 전설을 역사로 환원하는데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여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만들었다. '삼국지·위지魏志·동이전東夷傳'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은나라 말기 제을帝乙의 동생이자 주왕紂王의 숙부로 폭정을 피해 조선으로 도망친 기자가 그곳에서 백성들에게 예의를 가르치고 농경과 직조를 알려주었으며, 범금팔조犯禁八條를 통해 한반도에 예화교의禮化敎儀가 시작되었다고 썼다.
기자조선은 기원전 194년 위만에 의해 멸망한다. 위만조선에 대한 기록 역시 '사기'나 '삼국지'에서 살필 수 있다. '사기·조선열전'은 "조선왕 위만은 연燕나라 사람이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과연 그가 당시 중국말을 쓰는 연나라 사람이었을까? 조선말을 쓰는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었을까? 그가 도읍지로 삼았다는 왕검王儉이 과연 지금의 평양일까? 사마천은 '송미자세가'에서 기자조선에 대해 언급하고도 왜 '조선열전'에서는 한 마디 말도 없는 것일까?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나, 여하간 그는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어떻게 무찔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했는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혹자는 '조선열전'을 고조선 멸망사라고 부르지만 나는 고조선 대 한조의 투쟁사로 보고자 한다. '조선열전'을 잘 읽어보면, 양자의 싸움이 결코 일방의 승리나 패배로 끝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무제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두 명의 장수(누선장군 양복과 좌장군 순체)를 보내 위만의 손자이자 조선을 다스리고 있던 우거右渠와 싸워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한나라 군사의 승리는 군사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분에 따른 것이었다.
단군영정 발견 기사.
그래서 사마천은 태사공왈太史公曰에서 "두 장군의 군대는 모두 곤욕을 치렀고, 장수 가운데 후侯로 봉해진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사군 가운데 두 개는 20여년 만에 폐지되고, 낙랑군과 대방군은 압록강 인근 토착민으로 시작하여 예맥계의 옥저沃沮, 동예東濊, 부여夫餘, 조선朝鮮 등의 여러 종족을 수용하면서 국가 체계를 만든 고구려에 의해 313년, 314년 사라졌다.
이는 고조선은 물론이고 이후 등장한 고구려의 역량이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간의 싸움은 언제나 있는 것이니 한사군이 영원한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게다가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한국형 청동기인 비파형 동검은 중원의 것이 아니라 동북 지역 요하遼河를 중심으로 한 요령식 동검과 유사하다.
고조선과 열국시대의 상황도
이런 점에서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은 예맥조선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필자는 동의한다.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국사학계에서 검토가 끝난 상황이다. 전해종의 '동아시아사의 비교와 교류', 동북아역사재단의 '동북아 관계사의 성격' 등에 실린 논문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의 한국, 한국사에 대한 첫대목은 여전히 기자 운운이다.
고구려 유민 건국 발해 누락한 고려
“기자 분묘 찾아 사당 세우고 제사”
잘못된 정사 기록이 마치 진리처럼
가장 큰 문제는 중국인들의 한국 몰이해의 근원이 되었던 첫 번째 문제의 근거가 중국인들 자신이 쓴 사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뿐더러 자국 편의의 기록이다. 역사기록이 단절된 민족은 어쩔 수 없이 남의 역사를 통해 자신의 왜곡된 형상을 주어 담을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가장 오래된 사서로 알려진 '삼국사기'(1145년쯤)와 '삼국유사'(1281년쯤)는 당시 남아 있던 고기古記(백제 '서기書記', 고구려 '유기留記' 등)가 소략하고 거칠다고 하였으니 주로 중국의 기록과 전해지는 이야기를 위주로 편찬했을 터이다. 아쉬운 점은 고구려(5세기 중엽 고려로 개칭함)를 계승했다는 고려가 오히려 고조선의 국조國祖 단군왕검에 대해 일언반구 말이 없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 '기이紀異'에 그에 대한 언급이 있어 다행이기는 하나 정사에서 사라지니 전설이나 야사로 고정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사마천은 오제를 본기에 넣었으나 그의 '사기'에서 이름을 딴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전설이라 하여 단군왕검을 완전히 배제하고, 오히려 윤식潤飾 가능성이 농후한 발언, 즉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구절을 자랑스럽게 삽입하여 해동역사의 기원으로 삼았다.
일연의 '삼국유사'.
더욱 한심한 것은 스스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유민이 건국한 발해를 쏙 빼먹었다는 점이다.
어찌 김부식만의 잘못이겠는가? 이미 연로한 감수국사監修國史인 그와 함께 편찬에 참가한 10명이 모두 책임이 있고, 무엇보다 고려의 국왕이 온전히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고려 숙종 7년(1102년) 예부禮部는 "기자의 분묘를 찾아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낼 것을 상주했다" 고려만 그리하였는가? 1419년(영락 17년) 세종이 즉위한 다음 해에 기자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비를 세웠다고 하니 기자조선의 영향이 참으로 질기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종이 직접 명하여 기자사당에 단군을 배향하던 것을 단군 사당을 별도로 짓게 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이다.
조선 사람들이 알아서 기자를 찾아 모신 것은 이보다 오래 전의 일인 듯하니, 오대 후진後晉시대 940년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945년에 완성된 '구당서·고구려전'에 "조선 사람들은 기자를 존중하여 조선의 전통 신령, 영성신靈星神, 오신五神, 가한신可汗神과 병렬하여 공동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정사에 기록되어 한 번 뇌리에 박힌 관념은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이리 오랫동안 진리가 된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