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1)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41)
  • 입력 : 2019. 12.05(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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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4-1. 가을비는 낭만에 젖고



그녀의 정성스런 간호는 부부의 도타운 정을 느끼게 했다. 리화가 용찬에게 쏟는 정성은 이성에 대한 극진한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소문은 태풍과 같다. 처음에는 자그맣게 몰려다니다가 주변의 세력들을 모으면 점차 괴물처럼 그 정체를 드러내며 피해를 남기기도 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슬그머니 뒤꽁무니 치며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하나도 프로젝트는 메머드급 태풍이 되어 제주도 전역을 강타했다.

하나도 섬 전체를 관광공원으로 하는 '하나도 프로젝트 시행계획'이 1면 광고문으로 전격적으로 공고되었다. 이는 국가전략사업으로 확정되어 법에 따라 토지를 강제 수용하게 되었고 주민들은 쫓겨나게 생겼다. 당국에서는 이에 대한 타당성 용역조사 결과 제주도 경제와 일자리 창출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내용을 그래픽과 수치를 곁들이며 연일 언론을 통해 홍보했다.

도민들은 또 분열 되었다.

삽화=고재만 화백

주민들을 상대로 설명회가 마련되었지만 반대 측의 저지로 무산되었고, 방송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찬반토론회가 계속되었다. 관광업 단체들과 관변 단체들의 지지 광고와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 시민단체들의 언론 광고를 통한 다툼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도청 앞에서는 생업을 제쳐 둔 하나도 주민들과 출향한 향우회원들이 연일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시청 앞 광장에서는 밤마다 시민, 학생들이 모여 반대 촛불 집회를 열었다.

하나도에서는 마을 청년회를 중심으로 선착장에 모여 도항선이 도착할 때마다 '중국놈 물러가라, 도지사 자폭하라' '하나도 프로젝트 철회하라'는 격렬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급기야 주민과의 대화를 위해서 도지사가 하나도를 방문한 날, 청년회장이 도항선에서 내린 도지사가 보는 앞에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분신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리화는 거의 매일 문병을 왔다. 그녀는 할머니나 어머니가 곁에 있어도 자원해서 용찬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잔심부름도 스스럼없이 하면서 한 가족처럼 지냈다. 용찬은 숨 쉴 때마다 옆구리가 쑤셔서 고통스러웠지만 얼굴과 머리 상처가 아물고 팔의 깁스를 풀면서 조금씩 여유를 찾았다.

어느 날 병원 뜰을 함께 걷던 어머니가 용찬에게 물었다.

"얘, 용찬아!"

좀처럼 말이 없으신 어머니가 뒤에서 부르자 용찬이 돌아다보았다.

"그 중국 애 말이다."

"어머니도 참. 중국 애가 뭐예요? 리화 이름 몰라요?"

"그래 리화. 너 그 아이 어떵(어떻게) 생각햄시?"

용찬은 그렇잖아도 오늘따라 늦는 리화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는 성실한 간병인처럼 젖은 수건으로 용찬의 몸 이곳저곳을 스스럼없이 만지며 닦아냈다. 용찬은 그것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수행하는 리화가 고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다른 생각을 했다.

처음엔 리화가 매일 문병을 오는 것이 제 오빠의 잘못에 대한 회개의 의미로 생각했지만, 날이 갈수록 그녀의 정성스런 간호는 부부의 도타운 정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이성에 대한 극진한 사랑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리화는 애가 있는 이혼녀에요."

"그건 안다만 나가 보기에는 마누라도 경(그렇게) 못한다. 늘 하영 좋아하는 거 고뜬디?(너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에이 어머니도. 옛날 가정교사 할 때부터 오빠라 부르며 잘 따랐잖아요? 나 없을 때도 집에 자주 놀러 왔다면서요?"

"느네 할망이 좋아했지. 맛있는 중국 과자도 가져오고."

"중국 애라고 아무도 상대 안 해주니 외로워서 그런 거예요."

"헌디 다 늙은 할망신디 땅문서 줄 때는 무슨 의도가 이신 거 아니가?"

용찬은 뜬금없는 땅문서라는 말에 놀랐다.

"무슨 땅문서요?"

"할망이 그치록(그렇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조상 묻힌 땅 말이다. 그 문서를 할망 이름으로 등기허연 주어시네."

"기꽈?(그래요?)"

"그거 아무나 할 수 이신 일이가?"

용찬은 리화가 대단한 여자라 생각했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찾고자 했던 땅에 대한 넋두리를 리화에게도 풀어놓았을 것이다. 리화는 잊어버리지 않고 여유가 생기자 나이든 친구의 소원을 풀어주었다. 중산간에 있는 자그만 임야는 있는 사람들 돈푼으로 따지면 하찮은 것이지만, 그건 어머니 말처럼 있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할망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지꺼정(기뻐) 허는디..."

"뭐가 걱정이우꽈? 그냥 할머니가 좋으면 된 거지. 고맙다고 인사는 해수과?"

"인사야 했주만, 마음이 짠한 게 여러 생각이 들더라."

"어머니도 참. 그냥 선의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 집안 그런 능력 있고, 그 애 붙잡아도 여기 없어요. 일본 가서 살 거래요."

용찬은 어머니가 애 딸린 중국 여자가 며느리로 들어앉을까 봐 지레 걱정하는 건지, 돈 많은 리화를 며느리로 삼았으면 좋겠다는 것인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권 기자님. 아직 소식 못 들었어요? 신문, 방송에 다 났는데."
"무슨 일 있어요? 다쳐서 입원해 있느라 아무 것도 몰라요."
"어머, 그랬군요. 문 처장님 공금 가지고 사라졌어요."



집 밖을 나섰을 때 용찬의 머리 위로 바싹 마른 플라타나스 잎이 떨어져 내렸다.

위를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이 시리게 푸른 하늘이 용찬을 빨아들일 듯 했다.

오랜만에 출근하니 사무실 오 양이 환하게 웃으며 반가워했다. 사무실 창가에는 쾌유를 비는 리본이 달린 화분들이 햇살을 받고 빛났고, 소국은 제법 향기까지 날리며 상긋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퇴원 무렵이 되자 리화는 병원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눈치를 주는 것이 섭섭해서 인사도 없이 출국해 버린 건 아닌가 했지만, 어머니는 결코 그런 일 없었다고 했다.

오히려 무슨 사고라도 난 거 아닌지 전화를 해보라고 했으나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기다렸다. 그러나 리화는 퇴원할 때까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퇴원 인사를 제일 먼저 해야 할 사람이 리화라는 어머니의 말이 생각 나 전화를 걸었다. 발신음이 두어 번 가기도 전에 리화의 목소리가 반겼다.

"어머, 오빠 퇴원했어요?"

쾌활한 목소리가 들리자 용찬은 마음이 놓였다.

"그래. 난 또 기별도 없이 출국해버린 줄 알았지."

"어머, 미안해요. 사업이 바쁘기도 했지만, 우리 아빠가 쓰러졌어요,"

"아 그랬구나? 어디 많이 아프셔?"

"간이 안 좋다는데, 서울에 입원해서 정밀 진단 중이에요."

"그랬구나. 그간 고마웠어. 헌데 병원비 계산됐던데 리화가 했어?"

"아니에요. 당연히 금산 오빠가 해야죠. 내가 으름장 좀 놓았어요. 어쨌든 내일 출국해야 해서 지금 제주 내려가려고 공항이에요. 오늘 저녁 시간 돼요?"

"시간은 만들어야지. 리화의 정성으로 쾌유했는데 빚은 갚아야 할 것 아냐?"

"어머 오빠. 어떻게 갚는지 기대되는데요?"



화분에 적힌 리본들을 확인하다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 문병 한번 오지 않은 대호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전화를 했으나 없는 번호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직감적으로 대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찬은 친구인 자신에게 그 정도의 상해를 입혔으면 대호에게 자비를 베풀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했더니 김 간사는 뜻밖의 얘기를 했다.

"권 기자님. 아직 소식 못 들었어요? 신문, 방송에 다 났는데."

"무슨 일 있어요? 다쳐서 입원해 있느라 아무 것도 몰라요."

"어머, 그랬군요. 문 처장님 공금 가지고 사라졌어요."

죽었다는 말이 아니라서 용찬은 안도했다. 그러면서 첫사랑 미란이라는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무런 흔적 없어요?"

"공항과 부두에 알아봤는데 아직 제주도를 빠져나가진 않았나 봐요."

용찬은 의심이 갔다. 이 좁은 섬에서 얼마 버티지 못하고 붙잡힐 텐데 어느 산속에 숨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미란이란 여자가 경찰의 검색을 피하지 못할 상황이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정소영이었다. 그녀가 현장에 있었으므로 용찬이 구급차로 실려 간 사실은 누구보다도 일찍 알고 있을 터인데 병문안도 오지 않았다. 전화도 없었다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원이 꺼져있다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룸 비즈니스 베이징에 전화를 걸어도 그날 이후 그녀는 출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의 행방을 금산은 알고 있을 텐데 그에게 전화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용찬은 본사 데스크에 전화를 걸어 복귀를 알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으로 지방신문을 검색했다. 지방선거에 대한 뉴스가 많았다. 각 당의 도의원 선거 후보자 공천 기사에 시선이 멈췄다. 그런데 여당의 공천자를 살폈으나 장석규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당에 있나 하고 살폈지만, 거기도 명단에 없었다.

용찬은 문병을 왔던 장종필이 자신만만하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분명 될 거야. 전 지사가 현직에 있을 때 얼마나 잘 모셨는데. 외국에 출장 갈 때마다 묵직한 달러 봉투를 챙겨 건네며 기름칠 해 두었거든. 내가 심부름해서 잘 알아. 헌데 그 전 지사가 공천 심사위원장이니 공천은 따 놓은 당상이지. 안 그래?"

그런데 명단에 없는 것은 필시 상황이 바뀐 것일 것이다.

'무슨 일이지?'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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