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어로 써내려간 12편
‘그 허벅을 게무로사’ 등
일상을 흔든 4·3의 참상
칠순이 된 작가는 말한다. "나를 포함한 '제주 섬사람'을 이해하는 데는 한참 긴 시간, 어쩌면 나의 온 생애가 필요했다." 장편 '한라산의 노을'로 일찍이 제주4·3의 서사를 펼쳐놓았던 한림화 소설가가 그 '섬사람'이 살아온 삶을 담은 소설집을 묶었다. 섬사람이란 말 그대로인 '디 아일랜더(The Islander)'로 '바람섬이 전하는 이야기'란 부제가 달렸다.
제주섬 사람들의 숨겨진 역사와 생활습관을 기록하려면 제주어여야 했으리. 작가의 고향인 성산 지역에서 주로 사용했던 말에서 빌려온 제주어들은 날것으로 소설에 자리잡았다. 그것들은 작은 따옴표로 구분되거나 괄호를 쳐서 풀어냈다. 거기에 더해 수록 단편 12편 중에서 '하늘에 오른 테우리' 등 후반부 5편은 별도의 해석없이 제주어로만 적어갔다. 대신 바로 옆에 나란히 표준어 문장을 실었다.
작가는 '게무로사', '메께라' 등 제주어로 표기했을 때 그 뜻이 온전히 전달되는 어휘를 단편 제목으로 올렸다. 때론 슬며시 웃음짓게 하는 상황으로 '지슬', '감저' 같은 제주어 특유의 의미를 끌어낸다.
소설은 제주신화를 출발점으로 일제강점기, 6·25전쟁으로 흐르며 과거를 바루고 진혼하려는 오늘날 섬사람들의 소망까지 닿는다. 그 중심에 4·3을 일컫는 '무자년 난리'가 있다.
허벅, 뚜데기가 나오는 물구덕 일습으로 시작되는 장면엔 선무공작에 걸려 토벌대 총에 죽은 막내딸의 사연('그 허벅을 게무로사')이 숨었다. 갓 볶아 만들어 먹던 시원한 미숫가루 한 모금에 행복해했던 섬사람들의 하루는 그 한사발 다 들이키지 못한 채 정방폭포로 끌려갔던 아들('보리개역에 원수져신가 몰라도')로 연결되며 비극으로 바뀐다. 성산일출봉에서 숨바꼭질하던 아이들은 '귀신'이라고 생각한 주검('곱을락을 헷수다마는')을 목격해야 했다.
소설 속 제주섬 일상의 풍경과 소박한 이들의 모습은 뒤잇는 핏빛 사연과 대비된다. '돗걸름이 제주섬에 엇어시민'에서 서북청년단 가족인 '이북집' 오빠가 돼지우리 안 검은돼지를 요크셔로 바꿔야 한다는 대목은 제주 전통문화와 섬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겹쳐 읽힌다.
'눈 우읫 사농바치'의 아버지는 두 딸을 앉혀놓고 '옛말'을 털어놓는다. "어느 날에고 시절 좋아지민 아바지가 해준 이런 말을 이, 다른 사람한티도 도시리라." 딸에게 전해진 그날의 이야기는 소설이 되었다.
무엇이 그들을 때이른 죽음으로 몰고갔을까. 살아남은 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까. '찰나 앞에서'의 빛사농바치는 그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인물이다. 지금 우리일 수 있는 빛사농바치가 송악산을 누비며 품는 바람은 단 하나다. 4·3 당시 "멜젓 담그듯 양민 학살한 놈들 보란 듯이 그 영혼들 빛으로 환생한 걸 제주 사람들 다 볼 수 있게" 한 장의 사진으로 포착하고 싶은 거다. 소설은 빛사농바치가 그 순간을 사진에 담은 뒤 끝내 눈을 감는 것으로 그려진다. 한그루. 1만2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