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와 역사가 짓밟고 소외시켜온 이들을 불러낸 시들로 신작 시집을 펴낸 김영란 시인.
슬픈 자화상 지닌 여자들
4·3에 낙인 찍힌 사람들멸치의 눈처럼 오는 고통
100년을 앞서 살았던 여성 나혜석. 시인은 화가이자 작가, 사상가였던 그를 가장 먼저 호명하며 시집을 열었다. '수없이 피고 지는/ 삶이 곧 사람인 걸/ 덧칠해도 더 불안한/ 세월은 마냥 붉고/ 한 시대 행간을 건너는/ 여자가 거기 있네'라며 '슬픈 자화상'을 노래했다.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고 '오늘의시조시인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 시력을 탄탄하게 쌓아가고 있는 제주 김영란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이다. '여자가 여자에게'란 시에 흐르는 구절에서 따온 '누군가 나를 열고 들여다볼 것 같은'을 표제로 단 시집은 시대와 역사가 짓밟고 소외시켜온 이들을 불러낸다.
시집의 가운데 부분엔 제주4·3 소재 시편들이 자리하고 있다. 만벵디 가는 길, 마포 형무소, 1948년 3월 조천지서의 김용철 고문치사사건, 행방불명인 묘역, 무등이왓, 벌건 꽃 지는 유도화, 이덕구 부대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지는 산전 등 시인은 '붉은 섬'으로 낙인 찍혔던 제주와 그것들이 현재까지 드리우는 그림자를 좇는다. 제주만 그런 게 아니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집단학살을 행했던 시골 마을 '밀라이' 등 시인은 사람사는 세상에서 버젓이 벌어졌던 폭력에 그만 아뜩해진다.
숱한 희생자들의 고통은 세월호를 넘어 지금 여기까지 닿는다. '들던 수저 내리며 밥상머리 등 돌리곤/ 오늘도 일그러진 얼굴 울먹이는 딸아이// 땡그랗게 노려보는 그 눈이 안 보여요/ 죽어서도 감지 못한 그 눈을 보라구요'('멸치의 눈')라거나 '유채꽃 일생 위로/ 트랙터가 지나갔다// 등뼈가 무너지고/ 혀가 잘려 나갔다'('꽃들의 예비검속-코로나19')는 시편에서 또 한 번 여리디여린 존재들의 죽음과 마주하게 된다.
지난 세월은 아름다운 풍광에 얽힌 기억을 앗아갔지만, 세상의 끝이라고 느낄 때 우릴 감싸주는 건 이 땅 밖에 없다. 시인은 '더 이상/ 갈 곳 없을 때/ 내게로 오라 했지/ 절벽에/ 머리 박고서/ 그렇게/ 견디자 했지'라며 달빛 길이 있는 '애월'로 향한다. 시인동네.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