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문화광장]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 서나니

[김준기의 문화광장]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 서나니
  • 입력 : 2021. 02.16(화)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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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영면에 들었다. 한 평생 민주주의와 노동, 통일 의제를 중심으로 진보적 운동의 맨 앞에 서 계셨던 분이라 각계에서 그의 삶을 기리는 마음들이 모이고 있다. 그이는 민족, 민중, 민주. 이른바 3민을 한 몸에 지녔다.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대결을 겪어온 한민족의 운명,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소외의 나락으로 내몰린 노동자의 삶, 제국주의와 군부독재의 엄혹한 정치현실에서 민주주의를 갈망한 시민들의 염원을 그이는 한평생 자신의 문제로 안고 살아갔다.

“혁명이 늪에 빠지면 예술이 앞장 서나니.” 백기완 선생의 말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그이의 정체성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할 법한 말이다. 하지만 그이는 예술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대해 누구보다도 깊은 혜안을 가진 예술 애호가로서, 세상의 변화를 앞당기기 위한 혁명의 예술을 옹호하며 함께 걸어갔다. 모진 고문을 받으며 살기위해 읊조렸던 자신의 시, <묏비나리>를 다듬어 노래가사를 만든 <님을 위한 행진곡>이 알려주듯, 그는 한 시대를 이끈 예술가이다. 오윤과 이애주, 신학철과 송경동에 이르기까지 그이는 예술가들과 함께 새 세상을 꿈꾸었다. 통일운동가에 대통령 후보를 지낸 정치인, 시민운동계 원로로 살아온 그이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를 통하여 감성적 소통을 극대화하는 예술가인 시인으로서도 아름다운 길을 걸었다. 백기완 시인은 글로 쓰는 시만이 아니라 말로 하는 시의 맛과 멋을 느끼게 해주었다.

백선생의 시는 곧 탁월한 선동가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논리적 언변에 공감하기 이전에 그의 말이 지닌 아름다움에 넋을 잃곤 했다. 말이 담아내는 메시지보다 먼저 그 말 자체의 매력에 빠지게 만드는 마력의 소유자였다. 셈과 여림, 빠름과 느림, 높음과 낮은, 속삭임과 외침 등 말로서 표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한 문단, 한 문장, 한 마디 안에 다 녹여 냈기 때문이다. 그 많은 상징과 은유, 직유, 대유, 환유의 언어들을 자유자제로 구사하면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탁월한 말재간꾼이었다. 그 아름다운 말들로 그이는 격동의 한가운데서 민중과 함께 뚜벅뚜벅 걸어갔다.

몇 년 전에 서울 혜화동 소재의 통일문제연구소로 찾아뵈었을 때, 즉석에서 자작시를 읊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나는 백선생의 ‘말’을 영상작업으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그이를 만났다. 나의 제안을 들은 노 운동가는 기꺼이 승낙을 해주었건만 나는 내 일상에 빠져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 그 구상은 다른 아카이브 작업으로나마 일부 가능하겠지만, 이제 다시 그의 육성을 들을 수 없으니 지극히 높은 수준으로 말의 힘과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고인의 부재는 대체불가능한 무형문화재의 상실이다. 20세기 후반 한국사회 격동의 한가운데서 통일운동가, 정치운동가, 시민운동가로서 그리고 행동하는 예술가로 살아오신 백기완선생의 영면에 삼가 고개를 숙인다. <김준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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