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병의 목요담론] 이삭줍기가 두려운 흰뺨검둥오리

[김완병의 목요담론] 이삭줍기가 두려운 흰뺨검둥오리
  • 입력 : 2021. 02.18(목)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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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습지에서 볼 수 있는 오리류는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홍머리오리, 청머리오리, 원앙, 혹부리오리 등 28종에 이르며 대부분 겨울철새이다. 흰뺨검둥오리는 철새도래지, 중산간 습지, 마을 연못, 논습지 등에서 번식하는 텃새이다. 겨울엔 북쪽에서 내려오는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른 종과도 함께 보낸다. 얼굴이 하얗고, 눈 앞뒤로 검은 선이 나 있고 눈썹선의 흰색이 뚜렷하다. 부리 끝의 노란색과 다리의 주홍색이 선명해 야외에서 쉽게 구분되지만, 다른 오리류와 달리 암수의 깃털색이 거의 똑같다.

오리는 식물성과 동물성을 모두 먹는 잡식성이며, 수면 위에서 또는 잠수해서 먹이 활동하는 무리로 나누기도 한다. 흰뺨검둥오리는 잡식성이지만, 물가에서 먹이를 찾는다. 철새도래지 주변의 농경지에서 유채와 보리의 싹 그리고 브로콜리 잎사귀까지 뜯어먹는 바람에, 농민들의 미움을 사기도 한다. 당근 수확 철에는 사람들처럼 당근 이삭줍기에도 나선다. 부리 속으로 당근을 넣은 순간, 인기척에 놀라는 장면이 마치 훔쳐 먹다가 밭주인에게 들킨 사람처럼 놀란 표정이다.

사실 예전에는 제주사람들은 고구마, 감자, 보리, 무, 마늘, 양파 등 밭주인이 수확한 곳에 들어가 이삭을 줍는 풍습이 자연스러웠다. 밭주인도 다음 농사일을 위해서라도 밭에 남겨진 이삭을 주어주니 고맙게 여겼으니, 이삭줍기는 신뢰와 배려의 표상이었다. 또한 고구마밭이나 보리밭은 학교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아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편의점이었다. 어떤 때는 제주에 여행오신 분들도 들어가기도 하고, 심지어 때를 맞춰 육지에서 내려오기도 했었다. 제주산 농작물이 몸에 좋고 비싸다보니, 제주 사람은 물론 관광객들에게도 이삭줍기는 허락받은 도둑질이기에 부지런할수록 이득이었다. 욕심이 과해서 먹을 거 이상으로 수확해서 이웃에게 선심 쓰거나 되팔기도 했다.

수확 끝난 경작지는 새들에게도 에너지 충전소이다. 논밭의 낟알은 오리나 기러기에게 중요한 양식이며, 당근밭도 오리들이 노리는 곳이다. 예전에 사람들이 먼저 이삭줍기에 나섰지만, 요즘은 오리들이 태연하게 이삭을 먹는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이삭줍기보다는 편의점이나 카페를 먼저 찾는 시대이니, 어쩜 오리들에게는 너무나 행복하다. 하지만 선량했던 농부 인심은 카메라를 설치할 정도로 예민하게 변해버렸다.

이젠 이삭줍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비싼 특용작물로 바뀌면서 경작지를 지나는 것조차 의심받는다. 올레길을 걷다가 귤 한 개라도 땄다가는 바로 뉴스거리가 된다. 오죽하면 CCTV로 농산물 절도범을 잡아낼 정도로, 인심이 예전 같지 않다. 오리들도 감시받는다. 도시 사람들의 지나친 욕심이 농부와 흰뺨검둥오리의 선의의 관계마저 끊어놓은 것이다. 넉넉하지 못한 사람에게 식량이 되었던 이삭줍기는 먼 옛날의 미풍양식이 되어버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아름다운 배려와 제주다움이 예전같이 않으면서, 흰뺨검둥오리의 마음도 편치 않은가 보다. 늘 자기편이라고 여겼던 인간 세상에 꺄우뚱거린다. 진짜 절도범은 봐주고, 가뿐히 내려앉아 이삭줍기에 나선 흰뺨검둥오리가 법정에서 노란 경고를 받게 된다면 그 억울함은 누가 해결할 수 있을까. 텃새와 철새 그리고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처지가 서로 비슷해야 불안하지 않는 법이다. <김완병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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