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홍성익의 '그림의 길, 음식의 길'

[이 책] 홍성익의 '그림의 길, 음식의 길'
“통일 되고 차별 없을 때 즐거운 그림”
  • 입력 : 2021. 04.09(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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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익의 '기원'(대화)(1987).

오사카 이쿠노 출신의 화가
4·3 겪은 부모 가업도 이어

재일조선인사 담은 회고록

그는 1989년 제주 땅을 밟았던 기억을 맨 먼저 꺼냈다. 어머니의 고향이고 아버지가 머물렀던 제주는 여전히 4·3을 말하지 못하는 섬이었다. 일본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해방 후 제주도로 갔지만 4·3의 와중에 간신히 목숨을 건져 오사카로 돌아왔다. 참혹한 학살 현장을 목격한 어머니 역시 구사일생 피난선을 타고 이카이노(현 이쿠노)로 건너갔다.

냉전의 틈바구니 속에 일어난 크나큰 비극인 4·3은 그의 성장기에 영향을 끼친 결정적 인자였다. 미술교사, 화가, 기업가로 살아온 재일조선인 3세 홍성익 작가다.

개인적 체험을 넘어 재일조선인사와 한일현대사를 다룬 그의 '그림의 길, 음식의 길' 한국어판이 나왔다. 어느 날 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와 수술을 통해 건강을 되찾은 그는 언제든 인생이 끝날 수 있으니 마지막 정리를 잘 하자는 다짐으로 30년지기 벗인 저널리스트 가와세 슌지가 인터뷰어로 나선 이 회고록을 출간했다.

'그림의 길, 음식의 길'은 지난 삶을 압축한 말이다. 노점상을 거쳐 떡 제조사인 덕산(도쿠야마)물산을 창립한 부모의 가업을 이은 그는 평양과 서울 등을 누비며 혁신적 기업가의 면모를 보였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떡, 냉면 등을 제조·판매했고 북한의 먹거리를 한국과 일본에 전하려는 활동에 나섰다.

기업의 대표 이전에 그는 일본 조선대학 미술과를 졸업하고 오사카시립미술연구소를 수료한 작가였다. 1987년 태평양미술회상, 1988년 문부대신상, 1990년 신진 미술인에게 수여하는 권위 있는 야스이상을 수상하며 주목 받았다.

그는 2017년 경영에서 물러났고 20년 만에 다시 붓을 잡는다. '이쿠노 코리아타운 출신 화가'라는 정체성을 지닌 그의 '기원' 연작 등엔 재일조선인들의 애환과 통일에 대한 열망이 스며 있다.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화풍이 바뀌었으나 남북이 통일되고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없어졌을 때 '즐거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란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조승미 옮김. 논형. 1만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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