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생존’해야 하는 ‘인간다움’

[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생존’해야 하는 ‘인간다움’
  • 입력 : 2021. 10.06(수)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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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유독 깔끔한 성격의 어머니는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과자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어머니는 불량한 식품이라는 정당한 이유로 나를 설득했지만 미각의 달콤함을 이미 알아버린 어린 꼬마에게 금기는 단지 욕망을 부추기고 이탈을 꿈꾸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이탈은 작은 다락에 숨어 생라면에 스프를 뿌려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생라면을 먹고, 만화책을 맘 편히 볼 수 있었던 작은 다락은 그 시절 나의 헤테로토피아였다.

헤테로토피아는 미셸 푸코의 미완성된 개념으로 '다른, 낯선, 혼종된'의 의미인 헤테로(heteros)와 '장소'라는 의미의 토포스(topos)의 합성어이다. 미셸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서 일종의 공상과도 같은 이상향의 세계인 유토피아와 '현실화된 유토피아'를 구분한다. ‘일종의 반공간’인 헤테로토피아는 관념 속 유토피아와 '실제 공간'이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와 다르다. 어린 시절 나에게 작은 다락이 헤테로토피아였듯 우리는 끊임없이 일상 속에서 '탈출'과 '해방', 혹은 '망각'을 위한 장소를 찾는다. 그러나 그 시절 작은 다락이 쉽게 발각돼 더한 절망을 안겨주었듯 과연 '현실화된 유토피아'는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요즘 세계적인 흥행을 거둬 연일 다양한 콘텐츠를 재생산하고 있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다양한 사유를 야기한다. 돈을 좇아 단순한 게임에 목숨을 거는 잔혹하고 자극적인 드라마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열광한다는 것은 어쩐지 쓸쓸하고 서글프다. 물론 흥행 이유는 자본주의의 민낯이 긴긴 코로나 시대와 맞물려 경제적, 사회적 모순이 극대화된 시의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잔혹한 공간이 '일남'이 만든 헤테로토피아라는 것과, 그곳을 선택한 456명의 사람들 역시 삶의 전환을 간절히 꿈꾸며 일상에서 '탈주'한 이들이라는 것이다. '일남'의 헤테로피아를 재현한 알록달록한 공간은 현실과 단절됐으나 더욱 치열한 현실 한복판이 되고 그 속에서 사랑과 배신, 복수와 연민, 연대의 변주가 뒤섞이는 인간의 연약한 본성이 여과없이 드러난다. 결국 모두의 헤테로토피아는 현실을 강하게 상기시키며 '탈주'의 한계성과 권력관계의 속성을 날카롭게 일깨우는 역설을 낳는다.

흥행 요인은 그 시대를 반영하기에 세계가 들썩이는 '오징어 게임'의 이슈화가 더욱 쓸쓸하게 다가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공간'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인간 본성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만큼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지만 선택과 의지에 의해 변모의 가능성이 열려있기도 하다. 우리 현실이 '오징어 게임'보다 잔혹하다면 생존 목표는 '인간다움'에 있지 않을까. 미셸 푸코도 미완으로 남겨놨듯 일상 속 헤테로토피아는 불가능한 것일 수 있다. 위태롭게 위드 코로나를 준비하고 있는 요즘, 마스크에 감춰진 표정과 긴긴 거리두기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가장 인간답지 못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끝내 지켜야할 마지막은 '인간다움'에 있을지 모른다. '생존'의 절박함으로 '인간다움'을 지켜낸다면 우리가 공존하는 '지금 여기'가 헤테로토피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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