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8)10월의 마지막 날

[황학주의 제주살이] (8)10월의 마지막 날
  • 입력 : 2021. 11.02(화)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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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중산간 언덕배기에서 바다를 향하고 있는 집이라 노랗게 익은 노지 감귤들이 여울지며 언덕을 따라 바다 가까이 한참을 내려가고, 우리들의 노래야 늘 바람이었다는 듯 날마다 바람 드나드는 걸 훤히 볼 수 있다. 청명한데, 담팔수 빨간 낙엽이 허공을 떠다니는 이런 외출이란 보는 이를 설레게 한다.

이웃마을 대흘리 한 카페에서 이효리씨가 자선 바자회를 열고 있다. 거기 잠깐 들렀다 오려고 집을 나서는데 우리집 맞은편 땅 주인인 이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몇 사람이 말고기 추렴을 했으니 먹으러 오라는 것이다. 잠시 다녀올 데가 있다 하고서 바자회 장소로 가는데 비눗방울 같은 바람이 살살 따라붙는다.

그때도 이 무렵이었는지 모르겠다. 운동을 하든 뭘 하든 몸을 부지런히 써야겠기에 집에서 가깝고 한적한 데 있는 요가원을 알아봐 갔더니 바로 이효리씨가 하는 곳이었다. 등록을 할 때 나는 속으로 "이효리씨 닮은 분이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가 첫 수업을 마치고 한 수강생에게 "혹시 저분 이효리씨?"라고 물었더니 맞는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웠을 텐데 언제나처럼 민낯에 자연스러운 미감을 감싼, 몸 전체에 맑은 바람이 이는 그때 그 모습일 텐데 아쉽게 내가 다녀가는 시간에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이효리씨는 어떻게 제주에 와 살게 됐을까. 나는 어떻게 제주로 왔을까. 아마도 우리는 무슨 바람에 의지해 왔을 것이다. 제주 해안의 자생식물들은 대부분 바람을 타고 왔다. 문주란, 선인장, 해녀콩 등도 나처럼 바람에 실려 처음 제주도에 온 존재물들이다. 그리고 세상에 와 우리는 모두 바람처럼 사는 거 같으니 나도 바람같이 살다 가보기로 했다.

집에 아내를 내려주고 나는 이 선생 댁으로 갔다. 부락 가운데 있는 이 선생의 집은 마당이 널찍하고 훤하다. 예전에 보리나 조를 타작하거나 널고, 마소의 꼴을 장만하는 일들이 모두 이 마당에서 이루어졌다. 그때의 이웃이고 친구인 몇이 마당에 둘러앉았는데, 우영팟에서 뜯어온 채소들이 상 위에 올라 있고, 말고기 굽는 냄새가 대기에 은근하다. 나는 평상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생고기를 몇 점 먹은 뒤 구워서 나오는 것을 한 접시 받아들고 다섯 명 중 아는 이가 한 사람뿐이어서 좀 멀쭉멀쭉하게 마당을 내려다봤다.

이 집은 흙질을 해서 만든 옛 제주식 마당을 꽤나 유지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비가 내리면 군데군데 물이 고여 물거품이 뜬다. 그걸 제주말로 '중'이라 하는데, 마당에 빗방울로 생긴 동그란 중이 얼마간 둥둥 떠다니다가 폭, 소리를 내며 사라지곤 하는 모양을 지켜보던 일이 예쁜 추억이라고 한다. 10월의 마지막 날, 돌담 밖으로 바람이 돌고 부부자식은 안거리에 주인은 밖거리에서 묵는 집이 어느새 어스레해진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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