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김양훈의 한라시론]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
  • 입력 : 2022. 04.28(목)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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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13일부터 시작된 제주4·3 미술 아카이브 기획전 ‘바라·봄’이 인사동 '제주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 1층 계단을 내려가자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이명복의 대작 두 점이 시선을 압도한다. ‘광란의 기억1’의 중앙에는 시커먼 어둠의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다. 토벌대의 추적을 피해 양민들이 숨어 지내다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피난처, 그들은 사냥꾼에 쫓기는 산토끼였다. 다랑쉬굴, 큰넓궤, 도틀굴, 빌레못굴, 대섭이굴이 그 이름들이다. ‘광란의 기억2’의 정면에는 마을의 수호목이며 증언자인 커다란 폭낭 두 그루가 캔버스를 가득 채우고 있다.

살해된 동백꽃과 해골이 유령처럼 부유(浮游)하는 ‘광란의 기억’에는 한 무리의 군상들이 아무렇지 않게 서 있다. 이승만, 조병옥, 딘, 박진경, 맨스필드, 송요찬, 로버츠, 유해진, 탁성록, 노덕술, 최난수, 함병선, 홍순봉, 서북청년단원들, 한경직은 어디에 있지? 이들과 함께 섞여 있는 평화협상 주도자 김익렬 연대장, 미군정의 하수인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던 문상길 중위, 상부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문형순 경위, 4·3의 의인들은 중과부족이다. 힘에 부친다.

관람객들은 두 그림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나는 시몬 비젠탈을 떠올렸다. 그는 나치의 학살로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 둘이 살아남은 우크라이나 출신 유태인이다. 평생을 나치 전범 추적에 바친 시몬 비젠탈은 1100명의 나치 범죄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올린 인물이다.

그의 책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는 제주4·3을 생각하는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진다. 사과 없는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 있는가? 그 어떤 범죄도 뉘우치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가? 희생자들을 대신하여 어느 누가 감히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는가?

제주4·3의 학살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하여 참회는커녕 입에 발린 사과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 가해자의 이름은 사라지고, 국가폭력으로 포장되어 빗겨갈 뿐이다. 화가 이명복의 용기 있는 붓끝은 망각의 시간을 멈추게 한다.

74년 전 오늘은 김익렬 연대장과 김달삼 무장대 사령관이 천신만고 끝에 평화협상을 타결한 날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사흘 후 '오라리방화사건'을 저질러 평화협상을 깨버렸다. 이를 핑계로 5월 5일 극비수뇌회의 끝에 초토화작전이 시작되었고, 6월 18일 새벽에는 제주 양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데 분개한 문상길 중위와 그의 부하들이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다. 평화냐 대량학살이냐를 가르는 고비가 이어졌다.

노벨문학 수상자 르 클레지오가 제주에 대해서 말하길,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갑갑하게 만든다." 가해자에 대한 심판은 없고 피해자의 슬픔만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다. 제주의 시몬 비젠탈 출현은 너무 늦어 기대 난망일까?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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