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수산리가 품은 비경과 비사 그리고 '양수의 난'

[문영택의 한라칼럼] 수산리가 품은 비경과 비사 그리고 '양수의 난'
  • 입력 : 2023. 03.07(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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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며칠 전 성산읍 수산리를 양만길 전 수산2리 이장과 고보진 선배의 안내를 받으며 답사했다. 국가지정문화재인 수산굴과 선사유적지인 벌라리굴을 비롯해 수산평과 수산한못, 수산진성과 대왕산 등 다양한 비경과 비사가 넘치는 곳이 수산리였다. 수산평은 옛 탐라목장 지경이고 수산한못은 수산평의 말들이 목을 축였던 연못이다.

1276년 원은 수산평에 160필의 몽고마를 풀어 탐라목장을 조성하더니 군마를 양산하고 일본정벌에 쓸 전함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산 들녘에 무성했던 수림은 광활한 초원으로 바뀌어 갔다. 탐라목장 경계지역의 덤불 속에는 제주에서 가장 긴 잣성이 숨어 있고 마을에는 원의 아막(阿幕)이 있던 자리인 가막자리·아막(阿幕)좌리(座里)라 불리는 곳도 있었다.

아막이 들어서기 훨씬 전인 1168년 이 땅에서 최초로 발생한 민란의 장두 양수 등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곳도 수산2리(곶앞) 양수동 지경에 숨어있었다. 양수 일행이 살았던 곳은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진 남거봉(낭껏오름) 동북쪽 지역으로 여겨진다.

무성한 대나무 숲들이 여기저기 심어져 있는 그곳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들이 198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곳 도처에 있던 당시의 집터와 골목들은 지금 밭으로 정비됐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 조정은 1105년 탐라국을 탐라군으로 1153년에는 군보다 아래인 탐라현으로 낮추어 현령을 파견했다. 탐라현령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는 최척경은 양수의 난과 관련이 매우 깊은 인물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한 '동서강목'에 '비서감 최척경은 청렴해 가는데 마다 명성을 쌓았다.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을 잘 다스린다고 소문이 났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최척경의 명성은 자자했다고 한다.

1162년 탐라에 온 최척경은 전임 현령들이 저지른 수많은 비리와 폐단을 바로잡으며 3년 동안 선정을 펼친 후 아쉬워하는 백성들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런데 3년 후인 1168년 탐라백성들이 당시 현령의 폭정을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졌다. 토호세력 가문인 양수 등이 수탈을 일삼는 현령을 축출하려 민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최척경이 다시 현령으로 온다면 항쟁을 멈추겠다고도 했다. 이윽고 가족을 동반한 최척경이 현령으로 다시 오자, 백성들은 스스로 난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양수 등 7명은 참수됐다고 전해진다.

수산2리 양수동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양수는 백성들을 위해 장두가 된 최초의 제주인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육지에서는 1170년부터 민란이 일어난 것에 비해 탐라에서는 2년 앞서 대규모 민란인 '양수(良守)의 난'이 일어났음도 전해지고 있다.

한편 양수의 난은 백성들을 등에 업은 탐라국의 주도세력과 소외된 토호세력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일어났다는 시각도 전한다.<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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