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주희의 하루를 시작하며] 옆으로 누운 말들

[권주희의 하루를 시작하며] 옆으로 누운 말들
  • 입력 : 2023. 05.03(수)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일보] 온기를 상징하는 따스한 계절 봄, 제주는 유의미한 행사로 가득하다. 특히 4월은 영등할망이 섬에 머무르는 동안 한 해의 무사를 기원하는 굿을 마을 곳곳에서 준비하고, 차가운 역사를 애도하는 추모의 물결도 이어진다. 연이어 맞이하는 가정의 달 5월은 '존재(存在)'와 '부재(不在)'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며 비단 가족만이 아닌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부모, 형제, 자녀, 스승에게 안부를 묻고 감사의 말을 전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1993년 UN은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건강한 가정을 위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노력하자는 취지로 '세계 가정의 날'을 지정했다. 이것은 어린이날을 비롯해 어버이날, 부부의 날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다. 우리나라도 1994년부터 '세계 가정의 날' 기념행사를 시작으로, 2004년 2월 '건강가정기본법'에 따라 세계 가정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했다. 당시 산업화, 정보화, 도시화로 인한 급격한 변화 속에서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의 형태나 의미도 변모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도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는 캠페인은 증가하고 있으나 운명공동체로 가족을 인식하는 인구는 오히려 감소하는 추세다. 이러한 현상은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관한 개념이나 인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 4월, 배윤주 시인의 '옆으로 누운 말들'이란 시를 읽고 전시의 제목으로 인용한 적이 있다. 온전히 전해지지 못하거나 내면으로 숨어든 감정, 우회적인 표현을 상징하고 언어가 주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연상하게 하는 표현이 마음에 와닿아 깊게 자리했기 때문이다. 부모의 역할과 자식의 도리를 동시에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인생의 어느 시기를 맞이하게 되면, 가족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생애 주기에 따라 맺거나 소멸된 수많은 관계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본다. 가장 익숙하기에 당연할 거라 믿는 감정들, 표현하지 못하고 주저했던 말들, 여러 가지 이유로 전하지 못한 채 누워있는 말들은 늘 자신의 주변에 자리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만 배우는 법이다."라는 괴테의 말처럼, 자신을 이루는 것은 주변을 향한 태도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족을 비롯한 관계에 대해 얼마나 사유하며 살고 있을까. 인간은 존재(存在)를 통해 부재(不在)의 의미를 깨닫기보다, 부재(不在)를 경험함으로써 대상의 소중함을 인지할 때가 많다. 제주의 봄은 관계에 대한 사유를 기반으로 자신이 견지한 태도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한 해의 절반을 향해가는 지금, 나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함께 관계한 이들에게 작은 용기를 내어보자. 옆으로 눕혀 두었던 말들을 가지런히 정돈해 계절의 온기를 담아 전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이다.<권주희 스튜디오126 대표·독립기획자>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40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