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서 범인들 수천만원 빼가는데 속수무책

제주서 범인들 수천만원 빼가는데 속수무책
인터넷 유포 가로채기 앱 이용 신종 범죄 추정 경찰 수사
인출 못하게 범행 계좌 지불 정지 신청했지만 거절 당해
특별법 상 피해 유형에 해당 안해 경찰도 "법 개정 해야"
  • 입력 : 2023. 07.10(월) 17:54  수정 : 2023. 07. 12(수) 11:10
  • 이상민기자 has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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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제주지역에서 '가로채기 앱'을 인터넷에 유포해 수천만원을 빼돌린 것으로 추정되는 신종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피해자는 자기 몰래 은행 계좌에서 수천만원이 송금된 사실을 알아채고 범인들이 돈을 인출하지 못하게 부랴부랴 지불 정지를 요청했지만, 법이 정한 피해 유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돼 논란이 일고 있다.

서모(42·서귀포시)씨는 요새 잠을 이룰 수 없다. 그는 지난달 21일 오후 2시쯤 휴대전화가 갑자기 작동하지 않자 수리를 위해 3시간 뒤 서비스센터를 찾았는데 A은행 직원이 자기를 다급하게 찾아왔다고 했다. 은행 직원은 서씨에게 "계좌에서 거액이 다른 계좌로 송금되고 있다"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다.

서씨는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되는 전화나 문자를 받은 적이 없는데도 거액이 빠져나갔다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서씨 몰래 그의 명의로 휴대전화까지 개통된 상태였다. 서씨는 피해를 막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녔지만 소용 없었다. 가게 이전 비용으로 모아둔 7000만원이 순식간에 증발해 범인들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10일 제주경찰청과 서귀포경찰서에 따르면 서씨는 가로채기 앱을 이용한 금융 사기에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씨의 피해사례는 기존 수법과 차이를 보였다.

가로채기 앱 금융사기는 범인들이 불특정다수에게 인터넷 주소(URL)가 포함된 '미끼문자'를 보내 클릭을 유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URL을 누르면 피해자 휴대전화에 가로채기 앱이 설치되고, 범인들은 이 악성 앱으로 개인정보를 빼내 금융 사기를 저지른다. 은행은 평소 고액 거래 내역이 없는 계좌에서 한꺼번에 많은 돈이 빠져나가면 고객에게 전화를 걸어 본인이 송금한게 맞는지를 확인하지만 범인들은 악성 앱으로 은행 전화까지 가로채 피해자 행세를 하기 때문에 금융기관도 범행을 알아채기 어렵다.

A은행 관계자는 "평소 고액 거래가 없는데도 피해자 계좌에서 수백만원씩, 수차례에 걸쳐 다른 은행으로 돈이 송금된 사실을 파악하고 피해자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범인들이 전화를 가로챘다"며 "범인들이 피해자의 개인 정보를 다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아무래도 수상해 피해자 직장에 전화를 걸어 피해자가 있는 곳까지 직접 찾아가 고액이 빠져나간 사실을 알리게 된 것"이라며 "밤 늦게까지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서씨가 전날 인터넷에 접속해 만화 보는 앱을 휴대전화에 깔았다는 진술을 토대로 범인들이 가로채기 앱을 인터넷에 퍼뜨려 피해자 스스로 설치하게끔 유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 진술에 비춰볼 때 가로채기 앱이 범행에 동원된 것으로 보이지만 서씨가 추가 피해를 막으려고 휴대전화를 초기화하는 바람에 실제로 서씨가 내려받은 앱이 가로채기 앱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휴대전화 등 전기통신을 이용한 사기 범죄는 순식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피해금을 회수하려면 피해자 계좌 뿐만 아니라 범행 이용 계좌에 대해서도 신속히 지불 정지(동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피해자 돈이 범인 계좌로 넘어갔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지불 정지가 이뤄지면 범인들이 이 돈을 인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전기통신금융사기 피해 방지 및 피해금 환급에 관한 특별법(특별법)은 범죄 의심 거래 계좌에 대해 일시 정지하는 제도를 두고 있다. 서씨는 A은행을 통해 범인 계좌가 개설된 상대방 은행 쪽에 지불 정지 요청을 했지만 모두 거절 당했다. 특별법이 정한 피해 유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특별법에 따라 범인으로부터 보이스피싱 전화 또는 문자를 받는 등 전기통신을 이용한 '기망' 또는 '공갈' 행위로 인정된 범죄 유형에 대해선 범행 계좌를 동결하는 지불 정지 제도를 활용할 수 있지만 서씨처럼 스스로 악성 앱을 깐 경우에는 기망·공갈을 당했는지가 모호해 이 제도를 적용할 수 없다는 게 금융기관과 수사기관의 공통된 설명이다.

서씨는 "내가 해당 앱이 악성 사기 앱인줄 알았으면 설치를 했겠느냐"며 "법이 갈수록 진화하는 범행 수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경찰 관계자는 "지불 정지 유형을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한다"며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동대문경찰서는 서씨를 상대로 한 금융사기 일당에 대포통장을 제공한 공범을 검거해 최근 검찰에 송치했다. 그러나 주범들은 아직 못 잡은 상태로 서씨 말고도 피해자가 더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상민기자 has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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