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철의 목요담론] 소동파와 추사, 예술은 실존(實存)이다

[양상철의 목요담론] 소동파와 추사, 예술은 실존(實存)이다
  • 입력 : 2023. 11.02(목) 00:00  수정 : 2023. 11. 02(목) 11:21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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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얼마 전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한·중서화교류 추사와 소동파의 만남전'이 있었다. 제주에서 갖는 국제전이 흔치도 않지만 추사와 소동파를 연관해서 기획된 '한·중서화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동파와 추사예술이 현대문화의 트랜드가 되길 바라면서 이글을 쓴다.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고증학자, 화가, 실학자이며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다. 그는 1840년 제주도에 유배되어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풀려났다. 9년 유배기간 중에 만들어진 '추사체'와 '세한도'등은 널리 알려져 있다.

소동파(蘇東坡,1036-1101)는 송나라 최고의 시인이며 당송팔대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중국 최남단의 하이난섬(海南島)에 7년간 유배되었다. 문장과 서화에 일가를 이뤄 '적벽부'를 남겼고, 왕희지'난정서', 안진경 '제질고'와 더불어 3대 행서로 전해지는 '황주한식시첩(黃州寒食詩帖)'을 썼다.

소동파와 추사는 섬에 유배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유가(儒家)의 의연함, 도가(道家)의 초탈함, 불가(佛家)의 원융을 동시에 구현한 독특한 존재로서 공통점을 갖는다. 추사는 초의선사(草衣禪師), 동파는 불인선사(佛印禪師)와 선문답을 나누며 교유했다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추사와 소동파는 750년이라는 먼 세월의 거리를 두면서도 오늘에 함께하고 있다. 이는 소동파의 예술관이 추사를 통해 시대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추사는 대체로 소동파에게서 비롯된 시(詩)·서(書)·화(畵) 일치의 문인취미를 계승하고, 기법보다는'심의(心意)의 표출'을 중시했다.

음양의 조화로 미를 구하는 전통서예는 대체로 왕희지 중심의 중화(中和)된 우아미를 변증법적으로 지켜왔다. 추사체는 필획의 비수(肥瘦)가 대비되고 결체(結體)가 균제 되지 않으면서 진솔하다. 이런 심미는 추괴기졸박(醜怪拙撲)에 근접하는 추사체의 특성이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추사연구가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는 "청조학 연구의 제1인자는 추사 김정희"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추사가 청나라를 갔을 당시 금석학과 실학이 흥했다고는 하나 청에는 추사만큼 그 뜻을 관철한 예술가가 없었다.

오늘날 현대성을 추구하는 서예의 심미는 전통적 순수미 보다는 특성미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실존의 체험적 표출은 형식상의 부조화와 불통일을 초래하여 추(醜)의 미로 이끈다. 근자와 와서 작가들은 규범적이었던 전통서법에서 석고문, 금문, 죽간, 백서, 전문, 새문 등 대전(大篆)이나 광초(狂草)에서 특성미를 찾는다. 이는 추사가 창신의 길을 찾았던 것과 같은 일종의 추사현상(秋史現狀)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170년 전의 추사미학은 지금도 유효하다.

추사예술을 얘기할 때 제주에 유배된 추사의 실존적 삶을 간과하여, 24살에 연경을 다녀오면서 옹방강과 완원을 통해 식견을 넓혔다는 점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처절함이 묻어난 추사체에서 추사의 실존을 보게 된다. 추사는 '예술은 실존하는 것'이며, 심미의 완성은 관념이 아닌 실존 그 자체임을 말해주고 있다. 결국 추사의 예술은 추사의 운명과 제주의 풍토가 일군 '실존적 삶'이라는 것이다. <양상철 융합서예술가·문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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