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2)1923년 직항로 개설, 첫 출항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2)1923년 직항로 개설, 첫 출항
"우리 형제들의 단결로 대판 항로 개통, 자주운항의 전사"
  • 입력 : 2023. 11.28(화) 00:00  수정 : 2023. 11. 28(화) 09:55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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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식민지 제주의 암울한 사회경제=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제주도민들도 식민지 지배체제에 편입되어 사회경제적인 고난을 겪었다. 일제는 1913년부터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사업 과정에서 일제는 농민들의 경작권을 몰수하고 개간되지 않은 목장토도 강제로 국유지로 편입시켜 버렸다.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빼앗겨 생활 기반을 섬 밖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제주도 사회경제는 본격적인 식민지 자본주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상품유통경제의 확산에 따라 자급자족 자연경제가 해체되어 갔다. 도민들은 돈을 벌기 위한 생산활동을 해야 했고, 산업구조의 취약성으로 인해 출가노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920년대 부산 제1부두 잔교와 관부연락선.

식민지 시대 들어와 제주도민들은 1인당 생산액이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심각한 빈곤 상태에 허덕이게 되었다. 제주도의 경제적 상태는 도민 1인당 평균 소득수준이 전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절대빈곤에 따른 굶주림은 출가노동의 기본요인으로 작용했다. 상품경제가 전면화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도민들은 화폐 취득을 위해 겸업노동과 출가노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으로 향하는 제주도민들=일본은 청일전쟁(1894), 러일전쟁(1904∼1905),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거치면서 공업화의 기반을 확충시켜 나갔다. 당시 오사카는 수도 도쿄를 능가하는 공업도시였으므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식민지 지배 속에서 경제력을 잃은 제주도민들은 현금 수입을 위해 오사카로 건너갔다.

일본 구마모토현 아마쿠사[天草]군에서 물질한 제주해녀. <大阪每日新聞> 1941. 9. 7.

일본으로 건너간 첫 제주사람은 해녀들이었다. 1903년 김녕 출신 뱃사공 김병선이 해녀들을 데리고 도쿄 미야케지마[三宅島]로 출가물질을 시킨 게 시작이었다. 일본 현지로부터 제주 해녀들의 노동능력을 인정받게 되자 계속 많은 해녀들이 일본으로 출가물질에 나섰다.

이어서 많은 노동인력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0년대 후반, 제1차 세계대전의 호황을 배경으로 제주사람들이 오사카로 건너가서 공장노동자로 고용되기 시작했다. 일본인 노동자와 직공이 현저히 부족해지자 노동력을 제주도에서 구하기에 이르렀다. 오사카 방적공장의 직원이 직공 모집을 위해 제주도 현지를 방문했다. 1911년 셋츠[攝津]방적, 1914년 도요[東洋]방적, 가네가후지[鐘淵]방적공장의 직공 모집 직원이 제주에 와서 남녀 청년들을 모집해 갔다.

오사카로 건너간 제주의 남자 직공들은 고무공, 철공, 유리공, 법랑공으로 취업했다. 여자의 경우에는 방적공이 단연 많았고, 고무공, 미싱재봉공, 유리공, 성냥공의 순이었다. 여성 방적공이 많은 것은 일본 오사카 방적공장에서 직접 제주 현지를 방문해 여성 방적공을 모집한 결과였다.



▶오사카 직항로의 개설=오사카로 도항한 제주사람들은 근면하고 우수한 직공으로 인정을 받아 더욱 수요가 증폭되었다.

제주의 출가노동자로 가득찬 군대환 갑판. 1934년 8월 2일 桝田一二 촬영

결국 1920년을 전후하여 오사카 공업자본의 적극적인 모집과 오사카에서 일하다가 귀환한 사람들의 경제생활 향상에 대한 소문 확산, 일본 도시에 대한 동경 등이 맞물려 제주도 내부에서 일본 도항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져갔다. 1922년 7월 오사카의 지역신문은 "오사카 조선인 가운데 제주도 출신이 가장 많다.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제주도 사람들"이라고 보도했다. 1922년 제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도항자 수는 3503명(남성 3198명, 여성 305명)이었다. 오사카에서 취업하는 제주사람의 급증은 정기직항로 개설의 직접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1915년 4월에 제주도-부산 항로가 개설되자, 부산-시모노세키(下關) 경유로 오사카로 도일하기 쉬워지게 되자 오사카 도항자가 더욱 증가했다. 당시에는 우선 부산으로 나와 관부(關釜)연락선을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간 후 기차 편을 이용해서 오사카로 향했다. 그러나 부산을 경유해서 일본으로 향하는 루트는 시일과 많은 경비가 소요되었으므로, 제주사회에서는 제주에서 오사카로 직접 향하는 직항로가 개설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결국 1923년 2월 제주-오사카항로가 공식 개설되기에 이르렀다. 1923년 12월에 오사카부 사회과가 정리한 <조선인 노동자 문제>라는 문서에는 "1923년 2월부터 조선 제주도와 오사카를 직항하는 조선인 전용기선의 항로를 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오사카 직항로를 처음 운항한 제주 선박=종래 제주-오사카 항로에 운항했던 배는 오사카의 아마사키[尼崎]기선에서 운항한 군대환[기미가요마루]과 일본자본의 조선우선(朝鮮郵船)주식회사의 함경환과 경성환 정도로 알려져 왔다. 1924년 이래 일본 측 2대 재벌 기업인 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이 이 항로를 줄곧 독점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1920년대 오사카 테라다[寺田] 방적공장 여공들의 춘계야유회. 제주여성사자료총서Ⅰ 사진자료집

"제주기선과 제우사를 상대로 아마사키기선의 대경쟁" <朝鮮時報> 1923. 7. 15.

그러나 제주상선(濟州商船)주식회사, 제우사(濟友社) 기선부, 조천 출신 김병돈의 역할 등 제주 토착자본가들이 일본자본에 앞서 기민하게 움직인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본 <조선인 노동자 문제>에는 '내선(內鮮) 간의 조선인 전용기선 발착 상황'(1923년 2월부터 6월까지)이 적혀 있다. 여기에는 아마사키의 선박보다 한 달 앞서 1923년 2월에 제우사가 맨 먼저 배를 출범시켰고, 6월까지 총 11회 출항한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또한 2월에 조천 출신 김병돈의 배가 출항한 사실도 적혀 있다.

조선일보(1923. 8. 23.)에는 "근년에 와서는 산업발달과 문화향상 됨을 따라 우리 형제들의 단결로 제주상선주식회사와 제우사 기선부를 조직하여 부산, 목포와 일본 대판까지 항로를 개통"했다고 보도했다. 제주상선은 1922년 8월 10일 김근시, 최윤순, 김태호, 박종실, 황
순하 등 지역 토착자본가들에 의해 설립된 선박회사였다. 1923년 1월 31일 제주-오사카 항로에 취항하는 등 의욕을 보였으나, 1924년 이후 아마사키기선과 제휴하여 하청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제우사는 한 번 항해에 120명 정도 승객을 탑승시키는 작은 기선을 운항시켰지만, 1923년 4월에는 월 4회 기선을 띄울 정도로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5월에 제판항로 취항선을 2척에서 1척으로 줄이고, 아마사키기선이 취항시킨 군대환의 가격 인하 경쟁에 밀려서 8월 이후로는 제주상선과 통합되었다.

제우사와 제주상선의 움직임을 통해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의 이면에 제주도민들의 주체적인 의지가 개입한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이는 몇 년 뒤 군대환·함경환·경성환 등 일본자본의 독점 운항에 대응해 자주운항운동을 펼쳤던 제주인의 모습을 이해하는 전사(前史)로 기록될 것이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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