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소주 만들고 난 찌꺼기
소주아래기, 쇠자래기.
솜리* 소주공장에서는 그걸
한 동이에 오십환씩 팔았다
쇠자래기 한 동이면
사나흘은 견뎠다
그걸 오래 먹으면 배창시가
종이처럼 얇아져서 터져 죽는다는
그 검붉은 찌꺼기를 줄 서서 받아다가
보릿고개를 죽 쑤어 먹곤 했다
술냄새 두엄 냄새 범벅이지만
달착지근한 사카린 맛에 흘려 먹다보면
뱃속은 잠시 든든한데 머리가
핑핑 돌고 어지러웠다
쇠자래기죽에 취해서 학교 가던 논두렁길에
픽픽 쓰러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 이리(지금의 익산)의 옛 이름.
삽화=배수연
소주 만들고 남은 찌꺼기, 쇠자래기로 쑨 죽을 먹으면서 이 세상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있었다 해도 각자의 쇠자래기죽 한 동을 오십 환씩에 사들고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었을까. 이러한 비참한 조건이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비밀한 존엄성을 무너뜨릴 순 없지만, 그것이 지금 완료된 근대사의 한 풍속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우리네 삶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죽에 취해 픽픽 쓰러지는 누더기 같은 아이들의 영혼을 오늘의 시대는 어떻게 보듬고 있을까. 쇠자래기죽을 못 먹어본 게 누군가에겐 비극일지도 모르지만, 잘 산다는 게 무엇인지 꿈속처럼 흐리다. 지역어에 시적 자질과 자주성을 부여하고, 자신의 삶터인 지역민의 개별 경험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끌어내는 시인 정양 선생은 비포장도로 같은 언어의 압도적인 질감을 정교하게 이끌 줄 아는 노시인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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