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사무치게 불러온 노래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백난아(본명 오금숙)가 1942년 발표한 '찔레꽃'이다. 고향 명월리의 그 초가삼간은 4·3때 불타서 찾을 길이 없지만 아직도 그 멜로디는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있다. 제주를 떠나 전국을 무대로 활약하던 가수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을 것이다. 고향사람들이 그녀가 작고한 후에 노래비를 세우고 영혼을 고향 명월리의 품에서 안식하도록 하였다.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모두의 서정성을 품어주는 그런 의미에서 명월리가 보유한 기품과 가치가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1600년 이전까지 명월리의 영역은 지금의 금악리, 동명리, 상명리, 옹포리를 모두 합친 마을이었다. 실로 대촌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중산간 목축지대에서부터 옹포의 해산물까지 생존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포괄하는 하나의 생활권역이었을 것이다. 완만하고 동고서저 지형으로 바다에 이르는 지형임에도 유난히 들판을 이르는 지명이 많다. 진드르, 궷드르, 막개낭드르, 논머리드르, 미내기드르, 주근지드르, 소리드르 등 그만큼 농업소출에 필요한 양질의 경작지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것. 그러한 풍요가 여유를 가지고 학문의 길을 갈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을 터이니 섬 제주의 대표적인 양반촌이라는 명성 또한 자연스럽게 뒤따랐을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이 아니더라도 현실성을 바탕으로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이 거대한 마을의 형성은 필연이었다. 비양도 인근에 왜구들이 출몰하여 노략질 하는 경우가 빈번하니 방어가 용이한 지형을 찾아야했을 것이다. 해안에서 일정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도 바다를 조망하기에 용이하여 유사시에 격퇴가 수월한 지점을 선택해야 했기에 군사적 요충지로써의 명월리는 설촌과 번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의 명월리의 영역은 상동, 중동, 하동 셋이 모여 이뤄진 마을이다. 각 동네마다 마을회장이 있다.
홍영수 이장에게 명월리가 보유한 가장 중요한 자부심을 묻자 간명하게 대답하였다. "살아 있는 역사 자체라고 해야겠지요!" 설촌 시기부터 심어져 500년 넘게 냇가를 따라 60여 그루의 팽나무가 깊은 감동을 주는 마을. 생태자원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자연유산본부를 비롯한 여러 행정 부서에서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500년을 이어온 그 시간성이 가지는 의미는 팽나무의 존재가치에 앞서서 주민들의 연대의식에 더 큰 가치를 둬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에게 자주 듣는 질타가 있었다. "다른 마을에 500년 수령의 팽나무 한 그루만 있어도 보호수로 지정하여 난리를 펼 것이다. 그런데 60그루가 넘다보니 너무 흔하게 바라보는 모양이야!" 뼈아프게 행정당국에서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이 귀중한 역사관광자원이 활용방안이나 마을주민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에 필요한 예산이 전무하다는 것은 현상유지 행정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측되는 부작용은 어떤 발전적 몸부림도 거부하는 자세에서 시작된다. 현상유지는 퇴보라는 사실을 이 사안이 증명하고 있는 것.
제주의 뿌리 깊은 나무 명월리! 그러기에 꽃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릴 것이다. 안타까움은 그 과정에 현실로 자리잡고 있다. 이 유서 깊은 마을을 역사성과 문화자원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진 행정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유지와 관리에 머무는 것이 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바뀌지 않는 한 아무리 귀중한 자원도 그 가치를 잃어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명월리의 역사적 생태적, 문화적 가치를 조명하는 연구와 그에 따르는 활용방안을 통하여 주민들의 농외소득 증대에 필요한 중장기적 플랜이 나와 있어야 한다. 엄존하는 저 500년의 역사성은 그를 지켜낸 전통존중의 마을공동체의 노력과 문화의 결정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책무로 알고서 함께 살아온 팽나무군락은 이 시대가 보유한 너무도 소중한 생태교육의 장이기 때문이다. 삶의 공간과 함께한 저 팽나무들. <시각예술가>
밭담과 성담<연필소묘 79cm×35cm>
장마철에 명월진성을 그리는 것은 구름 사이로 귀중한 햇살이 내리쬐는 시간적 스릴을 만끽하게 했다. 외부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돌과 먹고 살아가기 위한 생존을 위해 쌓은 돌. 이 둘을 대비시키는 그림을 통하여 이 마을공동체의 역사성을 그리고 싶었다. 밭에서 밥이 나오지 성에서는 밥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성의 누각을 그리기 위하여 바쁘게 연필이 화면 위를 돌아 다녔는지 모르겠다. 빛을 그려내기 위한 작업에는 단색화라고 할 수 있는 채색이 배제된 그런 집약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오래된 흑백사진과도 같이 어떤 과거의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으로써의 의미도 찾으면서. 민중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밭담과 지배계급의 위용과 조세징수의 대상을 온전하게 지켜내기 위한 시설을 한 화면에 배치하는 것은 묘한 씁쓸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이 또한 살아왔던 사실이며 생존의 방식이었음을 어찌하랴. 제주 백성이 관리들의 수탈에 못이겨 바다 밖으로 도망가서 인구가 급감하니 200년 출륙금지령까지 내렸던 조선왕조가 왜구의 침입을 구실로 저런 진성을 쌓았다는 사실 또한 이해하기 힘들다. 성이 밭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밭이 성을 보호하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원근법을 활용하여 배치구도를 잡은 것이다. 그림으로 알리는 진실. 무엇이 있었다는 사실을 문화재적 가치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관점과 안목으로 바라볼 것이냐 하는 문제의식을 표현하였다. 그림 자체가 가지는 연필소묘의 광선 잡아내기는 치열함 그대로였고.
명월대에 대한 인상<수채화 79cm×35cm>
옛 선비들이 시를 읊던 명월대를 그린다는 것은 참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엄밀하게 서양화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채화를 가지고 그리게 되면 양복에 갓을 쓴 그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다. 그리하여 얻어낸 협상결과가 테두리를 먹선으로 동양화의 운필을 가져와서 그리되 500년 팽나무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광선을 명암법으로 살리는 방안이다.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호'라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문화사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고풍스러움을 간직하는 화면구성을 위하여 암반들의 거친 질감과 중심 부분의 주인공을 살리기 위한 명도대비를 강렬하게 투입하였다. 사실 주변 상황은 숲에 숨어 있는 형상으로 보일 정도다. 선비들이 화답시를 나누는 장소라고 하면 고풍스러운 정자를 떠올릴 법도 하거니와 명월대의 존귀한 가치는 '정자 지붕'이 필요 없었다는 상황이다. 팽나무 그늘이 있어서 비만 오지 않으면 됐으니 말이다. 자연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의 수를 발생시킨다는 의미에서 참으로 소중하게 다가온다. 오른쪽 하단은 상상을 하여 그렸다. 마을 어르신들이 어린시절, 명월대 옆 홍예교에서 뛰어내리며 물장구 칠 수 있을 정도로 맑고 깊은 냇물이 있었다고 하니 그 물이 있었던 시절을 그림으로 표현. 명월대라고 새겨진 비석 하나가 의미 깊다. 지금으로 치면 선비마을 양반촌에 꼭 필요한 문화시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소박하게 야외공연을 위한 무대로 사용해도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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