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초록과 빨강이라는 선명한 색의 대비 위로 금빛 장식들이 더해지고 그 위로는 새하얀 눈이 내린다. 많은 이들에게 상상만으로도 달콤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크리스마스의 풍경이다. 예수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비단 기독교인들만의 기념일은 아니다.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이 겨울의 복판에서 기쁜 마음으로 이 날을 기다려 기념하고 축하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다정한 말들로, 준비한 선물들로 온기를 나누고 한 해가 가는 마지막 즈음의 감정들을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바로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크리스마스는 어른들에게도 낭만이 도착하는 특별한 순간들로 채워지지만 특히 어린이들에게는 설렘이 증폭되는 겨울의 어린이날이기도 하다. 비밀스럽고 귀한 방문자인 산타클로스가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깊은 밤,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날아와 벽난로에 걸어 둔 양말 안에 원하던 선물을 넣어 놓고 간다는, 흰 수염의 할아버지 산타 클로스는 크리스마스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다. 그런데 세상에는 가족의 품에서 고요히 잠든 채 산타의 방문을 기다리는 어린이들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가족이라는 품, 연인이라는 어깨, 친구라는 손을 갖지 못한 채 홀로 외로운 이들 또한 우리의 곁에 있다. 모두가 더 가까워지는 시기에 혼자 더 멀리 가는 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어쩌면 매서운 추운 날 중의 하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메리 크리스마스의 옆에 있을 론리 크리스마스, 그토록 달콤한 것들의 곁에는 이처럼 쓸쓸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아일랜드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1985년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에서 석탄을 팔며 살아가는 일곱 식구의 가장 빌 펄롱(킬리언 머피)이다. 그는 매일 새벽 일어나 출근을 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는 노동자다. 또한 말수는 적지만 깊은 눈으로 작은 것들을 바라보며 도움의 손길을 주저하지 않는 다정한 이웃 어른이기도 하다. 매일 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빌은 화장실에서 석탄이 잔뜩 묻은 손을 비누와 솔을 통해 공들여 닦는다. 그리고는 가족이 모인 거실로 향해 아내와 다섯 딸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하루를 묻고 함께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빌의 일상을 천천히 따라가는 영화다. 묵묵히 석탄을 싣고 트럭을 운전하는 그의 움직임처럼 영화는 서두르지 않고 정확한 장소에 이야기를 전달하고자 제 속도를 찾는다. 그런 빌이 우연히 거래처인 수녀원에서 새라라는 소녀를 만나고 난 후 이야기의 트럭은 종종 멈춰서 갈 방향을 다시 찾기 시작한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지속되면 안되는 상황을 목격한 빌은 자신의 마음 속 석탄이기도 한 양심과 신념이 부딪혀 작은 불로 타기 시작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 자리했던 유년 시절 크리스마스의 조각이 그 연료가 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제목처럼 '너무 작아 외면할 수도 있을' 혹은 '내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그저 타인의 부분들'을 눈에 넣고 마음에 담는 사람의 이야기다.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아닌 빌의 선행은 어쩌면 고요했던 그의 삶을 뒤흔들 기폭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저 자신의 마음을 따른다. 눈을 감고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빌은 유년 시절 의문과 고통을 알아가던 자신에게 친절했던 이를, 그가 건넨 크리스마스 선물을 잊지 못한다. 그 작은 친절이 빌의 안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고 그것은 타인이 모르는 빌을 구성하는 요체가 되었다. 누군가의 친절로 어른이 된 어린이는 당연하게도 그 선함의 힘을 온전히 믿게 되고 빌이 그런 어른이 된 것이다. 어둠 속에서 떨고 있는 새라를 발견할 수 있는 눈, 그 눈을 마주한 뒤 요동침이 당연한 마음, 굳어지지 않고 움직여 향하는 다리와 주저없이 내밀 수 있는 손까지 빌의 모든 움직임을 지시하는 버튼은 그가 마음 속 깊은 곳에 간직한 친절의 씨앗이 만든 것이리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카메라는 빌을 연기하는 배우 킬리언 머피의 청회색 눈둥자를 골똘히 마주한다. 그 우주 안에 담긴 빌의 목소리와 마음이 흔들리고 단단해지는 순간들을 재촉 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지난 해 불 같은 남자를 연기한 [오펜하이머]를 통해 오스카를 거머쥔 배우 킬리언 머피는 이 작품에서는 석탄을 싣고 도로를 달리는 산타 클로스가 되어 영화 속 인물들과 영화 밖 관객들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건네고 있다. 영화의 낮은 채도에도 불구하고 선명한 해상도로 빌의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하는 킬리언 머피의 아름다운 연기 덕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달콤함이 없이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크리스마스 영화의 클래식이 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우리가 기적을 만날 확률은 적을 것이며 문 앞에는 선물은 커녕 택배 박스 하나도 없을 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고유의 선함이, 받아왔던 작은 친절들이 만들어준 작은 열원이 있음을 있지 않았으면 한다. 그것이 이 차가운 계절이 우리에게서 받고 싶은 유일한 선물이 아닐까.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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