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고독과 고립은 모두 외로울 고(孤)자를 쓴다. 고독해서 고립된 상태에 머무르는 건지 고립되었기에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찬 바람이 부는 것 같은 단어들이다.
고독과 고립은 명사이지만 동사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봐도 도무지 나아갈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 같은 이 쓸쓸한 단어들이 품은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매일 마주치는 내 사소한 외로움들이야 한겨울 흘러 내리는 콧물처럼 닦아낼 수 있지만 경험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타인의 먼 외로움이 품은 한기는 녹을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혹한의 외로움은 과연 닦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일까.
김보솔 감독의 장편 데뷔작 <광장>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장면들과 뜨거운 감정의 밀도로 채워진 애니메이션이다. 북한 평양으로 파견 온 스웨덴 대사관의 서기관 보리는 평양 시민인 교통보안관 복주와 사랑에 빠진다. 늘 감시 당해야 하는 이방인인 보리와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복주의 사랑은 타인들 사이에서 감지되어서는 안되는 관계. 큰 키와 흰 피부, 노란 머리의 보리는 평양의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나 쉽게 눈에 띄는 낯선 외모를 가졌으니 이 둘의 사랑은 이미 발각되기에 너무 쉬운데 심지어 보리의 곁에는 언제나 그를 감시하는 통역관 명준이 있다. 보리에게 사랑하는 복주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사람이고 언제나 자신 곁에 있는 명준은 둘 사이의 시간이 더해진 대도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타인이다. 세 사람은 각자가 가진 외로움으로 서로의 삶에 마찰을 일으킨다. 세상의 어떤 관계라도 접촉의 빈도와 면적에 따라 빳빳하고 뾰족했던 외피가 마모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불가능의 절벽에서도 희망이라는 손때에 기대곤 한다. <광장>의 세 사람에게도 그 손때의 시간이 허락될 수 있을까.
사랑은 분명 온기의 감정이다. 이 불가사의한 감정의 발생은 서로 다른 타인 사이의 거리를 가장 빠르게 녹일 수 있는 외로움의 처방전이 된다. 그러나 한편 사랑은 드러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불씨 와도 같다. 한 번 불 붙은 사랑이 진화되는 과정은 결코 잠잠하거나 고요할 수 없다. 언젠가는 이 땅을 떠나야 할 이방인인 보리와 체제 아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복주의 사랑이 한겨울 평양에서 위태로운 불꽃으로 흔들린다. 어둡고 차가운 겨울 밤 사랑의 불꽃만큼 시선을 끄는 것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편 명준은 뿌리 내린 이다. 그는 어떤 계절도 견뎌온 나무 같이 단단한 수피를 가진 채 보리를 지켜본다. 이 임무에 다른 감정이 끼어 드는 것을 허락할 이유가 없기에 명준의 벽은 견고하고 완고하다. 하지만 그런 명준이라도 보리가 던지는 사소한 온기와 보리와 복주 사이에서 피어나는 열기를 모두 막아낼 수는 없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명준의 벽에 어느새 사소한 실금이 생긴다. 틈은 빛을 건너오게 하는 통로, 보리를 감시하고 보리와 복주의 사랑을 쫓던 명준의 일방통행에 빨간 불이 켜진다. 외로움조차 느낄 수 없던 명준의 미동은 금세 유효한 진동이 되고 명준과 보리, 보리와 복주 사이에 겹쳐 있던 쓸쓸한 동토를 가로 지를 수 있는 새로운 길이 놓아진다.
<광장>은 78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의 애니메이션이지만 길고 깊은 체험을 하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체제의 이념 아래 체념한 것처럼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는 도시의 풍경이 스산하게 펼쳐진다. 그 위로 차가운 시대의 살갗을 뚫고 낯설고 귀한 감정을 마주하는 인물들이 움직인다.
영화는 내내 조심스럽다. 북한이라는 공간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세 인물들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싶어하기 때문으로 느껴진다. <광장>은 어둠 속에서 벽을 더듬어 나아가는 것처럼 서두르지 않고 보리와 복주, 명준과 보리의 관계를 찬찬히 두루 살핀다. 암적응의 순간은 마침내 찾아오기 마련이고 캄캄한 하늘 아래 세상에도 마법처럼 눈이 내리기 마련이다. 부수지 않고 깨어지는 틈을 기다리는 일이 애니메이션의 고행이라면 <광장>이 긴 고행의 끝에 마주한 것은 외로움을 밝힐 만큼 충분히 환하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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