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기록된 이야기, 기록될 이야기

[김연의 하루를 시작하며] 기록된 이야기, 기록될 이야기
  • 입력 : 2025. 04.16(수) 00: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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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누가 말하고, 누가 기억하며, 누가 삭제됐는가.'

역사는 언제나 이 질문 앞에 선다. 언급되지 못한 시간, 발화되지 못한 고통, 잊히지 않으려 버텨온 이름들. 침묵의 골짜기를 건너 마침내 세계가 응답하기 시작했다.

지난 11일, 유네스코는 '진실을 밝히다: 제주4·3아카이브'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한국 현대사의 깊은 상흔인 4·3이 이제 인류 공동의 기억이 된 것이다. 오랜 시간 진실을 지키며 침묵에 맞섰던 이들의 윤리적 실천이 국제 사회로부터 정당한 응답을 받은 셈이다.

등재된 기록은 1만4673건에 이른다. 군법회의 수형인 명부, 옥중 엽서, 유족의 증언, 시민사회의 진상규명 활동, 정부의 보고서까지. 모든 기록은 잊히지 않기 위해, 지워지지 않기 위해 써 내려간 기억의 흔적이다. 우리는 종종 기록을 사실의 축적으로만 이해하지만, 모든 기록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말했는지를 내포한다. 말해지는 구조에는 시선이 있고, 그 시선에는 배제와 선택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기록의 윤리는 진실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에서 출발한다.

제주4·3은 냉전과 분단, 국가 폭력의 구조적 모순이 남긴 상흔이며, 동시에 그 진실을 지켜내려 했던 민간의 분투가 낳은 민주주의의 기록이다. 이 기록을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고,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와 나눌지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과제다. 진실은 완성된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진리로 머무르지 않는다. 진실은 말해질 때 살아나고, 해석될 때 갱신되며, 응답받을 때 비로소 공동의 유산으로 확장된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을 '시작할 수 있는 존재'라 말했다. 인간은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계에 흔적을 남기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녀는 또한 '용서와 약속'을 통해 인간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건너고 미래를 다시 설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요한 것은 말함이 단지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와 공동체에 대한 윤리적 책임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제주4·3아카이브 역시 상처를 박제하듯 보존하는 기록이 아닌 그 진실을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자문이 필요하다.

4·3 기록이 유네스코의 목록에만 머물게 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침묵의 시작일 수 있다. 기록은 보존돼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다시 쓰여야' 한다.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와 공유돼야 하고, 공론장을 통해 현재적 질문으로 전환돼야 하며, 국제적 연구와 교류를 통해 전 지구적 공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기록된 이야기는 이제 남겨졌다. 그러나 기록될 이야기는 여전히 쓰이는 중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어떤 진실을 말할 것인가. 어떤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인가. 그리고 어떤 세계를 남기려 하는가.

잊지 않겠다는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기억으로 무엇을 시작하느냐일 것이다. <김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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