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영채 노인

[신순배의 하루를 시작하며] 영채 노인
  • 입력 : 2025. 04.23(수) 03:3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일보] 햇볕이 허락도 없이 거실 서편에 들었다. 동백꽃은 붉은데 꽃 떨어진 벚나무와 목련에는 이파리가 무성하다. 창문을 여니 햇볕을 따라 들어온 바람이 귓가를 간질인다. 나와 보라고.

해가 한 뼘이 못 미친 중천까지 올라있다. 포구 앞 편의점 오른쪽 경사길을 넘으면 시간에 퇴색된 노인정이 있고 안에는 세월에 탈색된 노인들이 앉아있다. 먼저 간 사람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었다가 살아 눈물 나는 얘기로 목소리가 젖기도 했으나 지금은 약속한 듯 헛헛한 시간. 잦은 하품으로 연신 햇볕을 베어 먹다가 뿌연 눈으로 포구 사람들을 쫓으며 시간을 증발시키고 있다. 다섯 빈자리. 한동네에 나서 어슷비슷한 삶을 살았으니 끝도 얼추 맞춤이 소원이겠으나 지난겨울은 두 명을 앞세우고서야 물러났다. 어쩌겠는가. 살아서는 풍파 맞받으며 같이 왔어도 갈 때는 뒷바람에 떠밀린 순으로 가는 것임을. 남은 이들은 빈자리를 보고 며칠 심란하였다가도 무사히 봄을 맞은 자신이 무척 대견할 뿐이고 오늘도 안녕함을 자랑삼아 노인정에 모여드는 까닭이다.

"영채 형님 저기 오네." 서너 걸음 뒤 반걸음씩, 박자를 놓치지 않고 서편 길로 반절하듯 등 굽은 노인이 오고 있다. 지팡이에 걸린 비닐봉지에는 어김없이 찬거리가 들어있겠다.

영채 노인은 92세다. 젊은 시절 아내와 옷 한 벌로 마을에 들어와 과수원살이부터 몸 굴리며 살았다. 읽은 것 없으니 몸으로 사는 도리밖에 없는 터였다. 네 자식 낳고 살면서 생쥐 구멍만큼 벌었어도 바늘귀 구멍만큼만 썼으니 20년 세월에 마당 거느린 집 세 채는 너끈했다. 살만하면 데려간다던가. 몇 년 병에 지쳤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노인은 두 해쯤 누운 송장처럼 살더니 지난해 봄에 비록 지팡이는 짚었지만, 포구에 걸어 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뿐인가. 석 달 전 구급차에 실려 갈 때만 해도 이제 끝이라는 게 마을의 중론이었으나 일주일 만에 제 걸음으로 포구에 들었으니 다들 보장된 백세인생이라 하였다. 노인의 말은 느리고 길어 중천의 해는 서편 절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내가 땀 조금 흘린 거 말고는 다 할멈 덕분이지. 이제는 쉬자 했는데 혼자 가버리데. 누워도 할멈, 일어나도 할멈, 할멈이 속에 들어차 있으니 밥알 넘기기도 힘들고 그저 방에 관 들어오기만 기다렸지. 그런데 죽어지지 않는 거라. 하기야 난 것도 내 뜻이 아닌데 죽는 거라고 내 마음대로 되나? 죽지 못하니 살 욕심이 생기데. 내가 살려고 할멈을 내보냈지. 마음이 허해. 그래서 자식 신세 안 지고 밥해 먹고 집안일하고 푼돈 노인일자리도 나가며 대신 속을 채워놓는 거야. 이 나이에 할 게 뭐야? 다들 옛 생각 비우고 부지런히 움직여. 그러면 살아져.

내가 알건대 이 봄에 꽃 지고서야 잎 나는 건 벚나무와 목련, 그리고 영채 노인뿐이다. 바람이 산뜻한 바다 내음을 내려놓고는 마을 안길로 내처 달리고 있다. <신순배 수필작가>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2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