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훈의 문화광장] 자연을 닮은 시간

[현승훈의 문화광장] 자연을 닮은 시간
  • 입력 : 2026. 03.17(화) 06:00
  •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라일보] 지난 4년에 걸쳐, 제주시 용담동에서는 '한천 보행로' 공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 지역은 한천 변을 따라 자동차 도로와 교량이 들어선 이래로 30년이 넘도록 걷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안전한 보행 환경 조성은 마을의 숙원 사업으로 대두 돼왔고, 이를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민들의 호평을 받는 중이다.

그러나 자연을 존중하며 공간을 개선하고자 했던 설계 의도가 흐려진 채, 인간의 편의 중심으로 보행로가 구현되고 있다는 것은 건축가로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혜의 환경에 건축이 들어서지 않고, 원래 상태 그대로 놓아둬도 좋았을 것을. 기획 당시에 필자는 천변 곳곳 무성한 나무들의 뿌리와 줄기를 피해 산책로 동선을 계획했었다. 하지만 공사를 진행하면서 일부 구간은 시공이 어렵다는 이유로 기존 수목들을 베어내고 그 자리에 보행로를 설치해 버렸다. 세월을 품은 우람한 나무 사이로 따뜻한 빛이 내리쬐던 곳에 구조물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이다. 하천 부지 안에 동네 어르신들이 일구던 텃밭과 옛 마을의 포제단 역시 육중한 구조물에 짓눌리며 사라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보행로는 한천의 새로운 주인이 됐다.

그럼에도 한천은 겸허히 상황을 받아들이며 새 생명을 피워냈다. 그러고는 점차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아갔다. 모든 역경을 수용하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의 할 일을 이어가는 자연의 본성! 그 회복의 기운 속에 훼손된 땅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자연을 존중하는 것이란, 그것의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더 넓게는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 그 자체를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대상으로서의 자연물만 보존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한순간의 결과물로 자연을 편협하게 인식해 온 것은 아닐까?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던 죄책감으로 인해 애써 회피하던 이곳을 다시금 용기 내어 마주했을 때, 자연은 서서히 사람이 만든 구조물을 감싸 안으며 우리를 달래주고 있었다.

가슴속 무거운 짐을 덜고 다시 보행로 위를 거닌다. 구조물 너머로 펼쳐진 한천이 보인다. 멀리 한라산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이 그린 기암괴석의 흐름. 세찬 물살을 맞으며 갈라진 암반 틈새로 솟아오른 풀. 부서져 나간 암석 파편이 깎이고 또 깎여 둥글어진 돌. 움푹 파인 돌그릇에 담긴 물이 바람에 흩어지는 움직임. 한천의 자연은 태초에 끓어오른 용암이 새겨온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진다. 순수한 원형이 끊임없이 변형되며 흘러가고 또 흘러오는 무한한 시간 말이다. 그 시간과 더불어 자연의 모든 요소는 자기 스스로 이뤄낸 모습이기보다 서로에 의해 다듬어지고 비치는 상호 관계로 자리한다.

여전히 한천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자고 손을 잡는다. 주인이 따로 없는 세계 안에서 자연과 인간은 본래 하나이지 않았던가. <현승훈 다랑쉬 건축사사무소>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12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