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만의 월요논단] 사람은 늙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다

[양복만의 월요논단] 사람은 늙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다
  • 입력 : 2026. 03.23(월) 01:00
  • 양복만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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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계절은 소리 없이 방향을 바꾼다. 아직은 바람이 차가운데도, 햇살 어딘가에는 이미 따스한 기운이 스며 있다. 우리는 늘 그 변화를 한 박자 늦게 알아차린다. 익숙했던 풍경이 어느 순간 낯설어질 때, 비로소 계절이 지나왔음을 깨닫는다. 그 느린 변화는 우리의 시간보다 먼저 움직인다. 초봄의 문턱에 선 지금 돌아보면, 지난 1월 말 제주에서 열렸던 장면이 떠오른다. 75세 가수 최백호가 무대에 올랐다. 사람들은 그의 노래를 들으러 왔지만, 어쩌면 노래보다 더 오래 축적된 어떤 깊이를 마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무대 위의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만, 관객이 바라보던 것은 목소리 너머에 켜켜이 쌓인 삶의 결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부재가 남긴 자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스무 살 무렵 어머니마저 떠나보낸 뒤 세상은 갑자기 넓어졌을 것이다. 넓어진다는 것은 때로 혼자 견뎌야 할 몫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가난했고, 몸은 약했고, 삶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버티는 쪽을 택했다. 통기타 하나와 혼자 써 내려간 문장들, 길게 이어진 침묵 속에서 그의 시간은 바깥이 아니라 안쪽으로 조금씩 가라앉아 그를 만들어 갔다.

젊은 날의 노래가 이별을 어루만졌다면, 중년 이후의 노래는 삶 전체를 돌아보게 했다. '낭만에 대하여'가 다시 불릴 때, 사람들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것이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끌어안은 사람의 고백이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말이 많아진다. 설명하고, 해석하고, 조언하려 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반대로 간다. 말이 줄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길어진다. 쉽게 답하지 않고, 상대의 생각이 스스로 자라날 자리를 남겨 둔다. 그 여백 속에서 다른 사람의 삶이 제 숨을 되찾는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의 성숙을 '자아 통합'이라 불렀다. 그것은 좋았던 것만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좋지 않았던 날들까지도 조용히 끌어안는 힘이다. 그 힘이 없으면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편안해지지 못하고, 끝내 자신의 지나온 날들을 원망하게 된다. 어른의 낭만은 설렘에 있지 않다. 상처와 상실을 지나왔음에도 스스로를 냉소로 닫지 않는 태도, 세상을 단정하기보다 조금 더 이해하려는 쪽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데 있다. 깊어진다는 것은 단단해지는 일이 아니라, 쉽게 무너지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내어줄 수 있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람 또한 계절처럼 서서히 변해 간다. 눈에 띄지 않는 날들이 쌓이고 스며든 끝에서, 우리는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지금 나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물음은 자신을 마주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 나이를 지나고 있는가, 아니면 삶 속을 통과하며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가. <양복만 제주영유아발달지원센터장·교육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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