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으로 읽는 제주예술사] (18)에필로그

[공간으로 읽는 제주예술사] (18)에필로그
막대한 예산·시간 들여 지은 문화공간은 안녕한가
  • 입력 : 2017. 12.18(월)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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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지역 주민 등 제주사람 땀과 눈물 밴 공간
문화 이주 추세 맞물려 유휴시설 활용 창작공간 늘어
공간 증가 속 건물 자체보다 인력·프로그램 등 운영 중요

무대와 조명 기구가 있는 공연장 하나, 그림 한 점 넉넉히 걸 수 있는 전시실 하나 있었으면 하던 날이 있었다. 1988년 대극장과 전시실을 갖춘 제주도문예회관이 생겼을 때 제주지역 예술계가 지지를 보냈던 데는 그런 배경이 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공연장·전시실 등 제주도 인구 대비 문화기반시설 숫자가 전국에서 앞순위를 달린다. 지금은 제주를 두고 '문화 인프라 부족' 운운하는 이는 거의 없다.

▶문화공간 지키려 했던 지역의 노력 기억해야=극장과 예식장을 전전하며 무대 공연을 올리고 다방에 그림을 펼쳐놓던 시절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제주의 문화공간은 하루아침에 '반짝' 지어진 게 아니었다. 지방비와 국비를 투입한 일에 더해 제주 사람들의 정성이 보태졌다.

관광 제주를 위한 밑그림이 그려지던 1960년대 '8만 제주시민'을 위한 제주시민회관이 모양새를 갖추게 된 건 제주출신 재일교포 기업인 덕이었다. 제주지역 메세나 운동의 출발점으로 기록할 수 있겠다. 기당미술관은 재일교포 독지가만이 아니라 서귀포시민들의 성금으로 탄생했다. 끝내 문을 닫았지만 세종갤러리가 폐관 위기를 넘기며 생명력을 이어가는 과정엔 문화공간을 지키려는 문화예술계의 노력이 있었다. 서귀포 김정문화회관 역시 공간 이름 앞에 달린 재일교포 독지가가 건축비를 기증하면서 빛을 봤다.

도립문예회관, 도립미술관 시대가 열린 건 그 후의 이야기다. 제주도문예회관, 제주아트센터, 서귀포예술의전당 등 3개 문예회관이 제주지역에 차례로 개관했다. 야외공연장인 제주시 탑동 해변공연장도 제주국제관악제 등을 품으며 활용도를 높여갔다. 공립미술관도 잇따라 들어섰다. 전국 첫 시립미술관인 기당미술관, 제주에 머물렀던 예술가를 기억한 이중섭미술관에 이어 제주현대미술관, 소암기념관, 제주도립미술관,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줄줄이 지어졌다. 버려진 건물을 리모델링한 제주시내 아라리오뮤지엄, 일찍이 제주에 이주한 작가가 가꾼 서귀포 왈종미술관도 제주 미술공간의 지형을 넓혔다.

▶빈집 프로젝트 등 버려진 시설이 문화공간으로=기존 막대한 예산을 들인 문화공간은 공연을 보고 전시를 관람하도록 짜여졌지만 일부 주민들이 이용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유휴시설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이 늘면서 그같은 문제를 개선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문화공간은 단순한 발표공간을 넘어 창작공간으로 확대됐다.

10년전 쯤 서귀포 지역에서 시각 예술분야 창작자들이 참여하는 빈집 프로젝트가 걸음을 뗐다. 작가들은 제주 지역 빈집에 머물며 새로운 문화를 접했다. 동네 주민들은 빈집에 깃든 예술가를 통해 미술을 만났다.

공적 영역에서도 빈집에 주목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2011년부터 진행한 빈집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제주로 둥지를 옮기는 예술가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시기와 맞물려 제주도 농어촌의 마을창고와 빈집들을 읍면으로 귀촌한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창작공간으로 제공했다.

도시재생과 연계한 문화공간도 증가했다. 제주시는 2014년부터 원도심인 관덕로 6길의 문닫은 상점을 창작실 등으로 바꿔놓았다. 제주대병원이 아라동으로 이전하면서 빈점포가 늘어나자 예술가들에게 무료로 빌려주는 사업을 벌인 결과다. 빈점포 무상 임대를 통해 이 일대에 공예 공방, 소극장, 전시실 등이 조성됐다.

옛 제주대병원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폐산업시설 문화재생사업 대상에 선정돼 지난 5월 '예술공간 이아'로 태어났다. 제주문예재단이 위탁 운영을 맡고 있는 이아는 시각예술 분야 레지던시, 교육실, 갤러리 등을 뒀다. 얼마전엔 제주도가 제주문예재단에 위탁해 철거될 뻔한 탐라문화광장 일대 여관과 목욕탕 건물을 되살려 산지천 갤러리로 꾸몄다. 서귀포에서는 올 한해 주말 공연이 끊이지 않았던 서귀포관광극장이 유휴시설 활용의 좋은 사례를 만들어왔다.

▶소규모 문화공간의 지속 운영 담보 위한 노력 필요=제주도와 제주문예재단이 내놓은 제2차 제주향토문화예술 중·장기계획(2013~2022) 최종보고서에는 '10대 대표 문화공간의 집중 육성' 항목이 있다. 한라도서관,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돌문화공원, 제주도립미술관, 해녀박물관, 제주4·3평화공원, 제주추사관, 소암기념관, 이중섭미술관, 제주평화박물관이 10대 대표 문화공간에 들었다.

전시 시설 위주로 공연장은 빠져있다. 대신 새로운 문화기반 시설로 확충해야 할 6곳 중에 제주민속공연장과 오페라하우스 건립이 제시됐다.

향토문화 중장기 계획에는 제주시와 서귀포시 원도심을 중심으로 추진하는 '일상공간의 문화공간화'도 언급되어 있다. 1단계 사업으로 옛 제주대병원을 전시와 아트마켓 중심의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하고 2단계에서는 제주시민회관을 국내외 예술가를 위한 레지던시와 창작스튜디오 공간으로 활용하는 안이다.

공간의 탄생보다는 공간의 성장이 더 절실해보인다. "막대한 예산과 시간을 들여 지어놓은 시설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야 할 때다. 기획자나 학예인력이 동반돼야 공립문예회관이나 공립미술관이 그 이름값을 할 수 있다. 번듯한 공간을 짓는 일보다 문화기반시설 전문 인력 배치의 적정성을 들여다보는 일이 시급하다.

마을에 자리잡은 소규모 문화공간의 지속 운영을 담보하는 일도 과제다. 지자체 예산이 끊기면 문화공간도 사라지는 일을 몇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제주도내 일부 읍면 지역 주민들은 여전히 문화시설에 소외감을 느끼는 만큼 이들 작은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야 한다. 문화공간이 차고 넘치는 속에 그것들이 얼마나 지역 주민, 예술가와 밀착되어 있는지에 방점을 찍어야 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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