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23)중화와 소중화(2)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23)중화와 소중화(2)
고려 소중화·조선중화주의 왕권 수호 방책일 뿐
  • 입력 : 2019. 10.17(목) 00:00
  • 김경섭 기자 kks@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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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사람들의 중원 경모
조선조 송대 주자학 필수로
'동몽선습'에도 중화 예찬
18세기 오랑캐 청나라 번영기
국가차원 조선중화주의 허상
사대주의 벗고 대한제국 등장


예전의 중국은 지금과 비교할 때 그리 넓은 지역이 아니었다. 사마천은 '사기·오기열전吳起列傳'에서 하夏와 은상殷商의 강역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는 "황하와 제수濟水(하남성)가 왼쪽, 태산과 화산(섬서성)이 오른쪽에 있으며, 이궐伊闕(하남성)이 남쪽, 양장산羊腸山(산서성)이 북쪽에 있다." 은상은 "맹문산孟門山(하남성)이 왼쪽에 있고 태항산太行山(산서와 하북의 경계)이 오른쪽에 있으며, 상산常山(하북성)은 북쪽, 대하大河가 남쪽을 경유했다."

서한 강역도.

대략 북쪽으로 하북, 남쪽으로 하남, 동쪽으로 섬서, 서쪽으로 산동에 이르는 영역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통제 가능한 영역은 지금의 하남성 북부와 중부 정도였다. 그곳이 바로 이른바 중원中原, 즉 천하의 가운데 있는 너른 평원으로 화하문명의 발상지이자 화하민족의 요람이다.

동쪽과 남쪽 바닷가까지, 즉 지금의 광동, 광서성과 산동, 절강, 복건성까지 강역이 확장된 것은 진한秦漢 시절이다. 하지만 북쪽은 기존 주나라의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진 시황제가 여섯 제후국을 멸망시켜 통일제국을 만든 후 제齊, 한韓, 조趙, 연燕 등이 만든 장성을 이어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과 관련이 있다. 만리장성 밖은 흉노와 선비鮮卑 북방민족이 자리한 곳이기 때문이다. 서쪽은 한 무제가 비단길을 개척하고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두면서 지금의 서장西藏까지 확대되었으나 서남쪽은 토번吐蕃이 자리하고 북방은 여전히 흉노와 선비가 자리했다. 또 한 번의 통일제국 당의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북쪽으로 치올라가 영토가 확장되었으나 서남쪽과 서북족은 토번과 돌궐에 막혀 허리가 심하게 좁아진 기형적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당 강역도.

외적의 침입에 도읍지마저 빼앗기고 남하했던 송은 금金, 서하西夏, 대리大理, 토번 외에도 멀리 몽고와 서요西遼 등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다가 결국 몽골 원나라에 멸망당하고 만다. 명나라는 통일제국이라고 하나 북쪽으로는 여전히 달단, 역력파리亦力把里(몽골 찰태태한국察合台汗國)에게 막혔고, 동북쪽 흑룡강과 우수리강 지역에 행정부서인 노아간도지휘사사奴兒干都指揮使司를 두어 경내 몽골, 여진족 등을 지배한다고 했으나 바로 옆에서 흥기한 건주여진建州女眞의 수령 누르하치의 후금을 막지 못했다. 결국 중국 봉건시대 마지막 왕조는 북방 여진족의 청나라가 차지했다.

남송 강역도.

이렇듯 역대에 걸쳐 북방은 중원에서 넘어보기 힘든 세력이었다. 그곳은 사이四夷의 하나인 북적北狄이 사는 야만의 땅으로 '이문치화以文治化'의 대상이었지만, 내심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사실 이미 일찌감치 제압한 남만과 동이를 제외하고 서남, 서북을 포함한 서쪽 여러 나라 역시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중국이 유일하게 북방에 대한 근심을 덜 수 있었던 시대는 아이러니하게 북방 민족에게 중원을 내준 조대, 즉 원나라와 청나라뿐이었다.

청 세종 애신각라(愛新覺羅) 윤진.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원에서 발원한 화하민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찬란한 문화를 창조했고, 이를 통해 이민족의 문화를 거침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마치 용광로와 같이 사방의 것들을 녹여 자신의 문화로 재창조했다. 중화문화의 위대한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동쪽에 자리한 한반도의 사람들이 중국을 지향한 것은 바로 이러한 문화의 위대성 때문일 것이다. 찬란한 문화에 대한 경모는 역으로 비천한 문화에 대한 멸시를 동반한다. 중국의 동북쪽은 한반도의 북쪽이다. 그곳은 중원에 뿌리를 둔 곳이 아니며, 오랜 세월 이른바 오랑캐가 사는 문화적 빈국이었다. 한반도의 사람들이 중원을 경모한 것과 북방을 멸시한 것은 동일선상에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손들에게 남겼다는 '훈요십조訓要十條' 제4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청 강역도.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唐의 풍습을 경모하여 예약문물을 모두 그곳의 것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지역과 풍토가 다르고 인성이 각기 다르니 반드시 같이할 필요 없다. 거란契丹은 금수禽獸의 나라로 풍속이 다르고 언어 또한 다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도록 하라."

독립성이 엿보이는 대목도 있으나 중국을 경모하고 북방민족을 경시하는 것은 다를 바 없다. 고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소중화'라 칭하기 시작한다.

저고리 여밈. 오랑캐의 좌임인가, 중화의 우임인가. 청나라는 우임이었다.

"(문종은) 오랑캐 풍속[좌임左임]을 중화의 풍속[冠]으로 바꾸고, 서쪽 건물에 책을 쌓아두었다. 황제가 보낸 조서는 친절하고 간곡했으며, 중국으로 가는 사신이 끊어지지 않았다. 성명聲名이 빛나고 문물이 번화하였다. 그들은 융성한 문물이 중국에 견줄 만하여 소중화라 일컬었다."('동문선' 권28, '문왕애책文王哀冊', 박인량朴寅亮 찬)

본격적인 '소중화' 타령은 역시 조선조이다. 송대 주자학이 조선의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모든 학인의 교과목이자 사대부들의 필수 학문이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어린 학생들이 배우는 '동몽선습童蒙先習'에 "이 때문에 중화인들이 우리를 소중화라고 일컬으니, 이 어찌 기자箕子가 끼쳐준 교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너희 소자小子(젊은아해)들은 마땅히 보고 느껴서 흥기興起해야 한다." 이 정도면 '소중화'가 어느 정도로 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에 명나라가 원군을 파견하여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명나라 만력제萬曆帝(신종神宗)의 '재조지은再造之恩'에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조 소중화가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동몽선습'.

그런데 이처럼 문명대국 명이 오랑캐 여진족에게 속절없이 깨질 줄 어찌 알았겠는가? 명이 사라지고 청이 등장했다. 그렇다면 청나라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아야 한다는 뜻인가? 오랑캐에게?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그 결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의 황제(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고두배叩頭拜를 올려야만 했다. 이후 조선은 260여 년 동안 청조의 군신관계를 맺게 된다. 청이 후금 시절에 조선을 침입하여(정묘호란) 맺은 형제지국의 관계에서 한 단계 떨어진 외교관계였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으나 역부족의 현실을 어찌 하겠는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명의 중화를 찾아 헤맬 것인가? 아니면 현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출구를 마련할 것인가? 그리하여 나온 것이 북벌론과 '조선중화주의'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하나는 망상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승리법일 뿐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적극 시행된 조선중화주의는 얼마가지 않아 허상임이 드러난다. 그것은 18세기 청나라가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번영기를 구가하면서 역대 어느 왕조보다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대로 왕조의 전성기는 대부분 한 두 명의 황제에서 끝이 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청조는 최소 3명, 강희, 옹정, 건륭제까지 최소 3명의 황제가 136년(1661-1796년)동안 최전성기를 유지했다. 당시 옹정제는 만주, 몽골, 한족의 제국을 표방하면서 한족의 문덕과 만주족의 무공을 함께 실현하는 것이 곧 진정한 중화라고 주장했다.

조선은 흥미로운 길로 떠났다. 하지만 자신을 중화로 자처하는 조선중화주의는 '소중화'와 마찬가지로 왕권을 수호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일 뿐이었다. 그나마 현실을 똑 바로 보고자 했던 북학파도 힘을 잃고 결국 새로운 중화주의를 자처하며 청을 멸시하는 태도만 살아남았다. 이후 그래도 대국이라 여겼던 청이 서양 외세에 형편없이 당하는 것을 보고난 후 청에 대한 멸시는 더욱 확고해졌고, 비로소 사대주의에서 벗어나 독립된 나라를 꿈꾸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대한제국의 등장이다.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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