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마을 밭 네마지기와 곽지리의 밭 한 마지기를 바꾸라면 그럴 생각이 없다며 거부했던 조상들. 지금 또한 그럴 것이다. 밭에서 나오는 소출량과 품질이 얼마나 좋았으면 다른 마을 밭의 네 배가 나온다는 것인가? 산업사회가 도래하기 전 농경을 기반으로 삶을 영위하던 시기에는 토질이 주는 혜택은 가장 강력한 경쟁력이었을 것이다. 밭 자체가 부촌의 기반이었던 마을. 지금도 사질토양의 장점을 살려서 양채류를 중심으로 부농공동체를 영위하고 있는 마을이다. 다른 마을에 비해 넉넉한 농업생산물이 지속적으로 생산됐다는 것은 글공부에 전념하는 선비들을 뒷바라지할 수 있었기에 선비마을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조상 대대로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마을. 마을의 외형에는 변화가 왔을지 모르지만 유전자는 사라지지 않아서 지금도 현직에 있는 학교 선생님이 수십 명에 이른다. 이러한 정서를 보여주는 마을 상징이 문필봉이다. 붓이 서있는 형상을 한 기암괴석이 바닷가도 아니고 밭들 사이에 서 있다. 참된 선비가 많이 배출되는 것은 '문필봉의 정기가 도와서'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자존심 강한 사람들의 땅.
곽지패총이라는 문화재는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바닷가 모래 해변에서 채취해 식생활을 하던 조개껍질들이 쌓이고 쌓여서 이뤄진 것. 지표상에 흩어진 유물 분포 범위가 1만평 이상이나 되는 대규모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철기시대(BC 300~0)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패총문화층을 보여주고 있다. 밑 부분 초기철기시대에 해당되는 곳에서는 구멍무늬 문화층이 확인됐고, 그 위층으로는 삼국시대 항아리형 적갈색토기 문화층, 다음으로는 통일신라시대 깊은 바리형토기 문화층과 연속해서 고려, 조선시대 각종 도자기와 질그릇 등이 포함된 문화층이 확인되고 있다. 곽지패총의 중심시기는 탐라시대(삼국, 통일신라)에 해당된다. 이러한 역사학자들의 연구 내용을 인용한 이유는 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이 최소 2300년이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역사교육 시설이 마련돼야 할 일이라 해야겠다. 이 섬에 살았던 사람들의 시기별 타임캡슐 곽지패총의 의미를 넘어서 지금 주민들의 족보와 같은 혈족적 자료와 다양한 근거들을 종합해 보면 900년 전부터 이 곳에 마을이 형성돼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탐라국 시기에서부터 농수축, 물산이 풍부했기에 자연스럽게 세력을 가진 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독자성을 가지고 교역강국을 구가하던 탐라의 기상 아래 함께 번성하던 곽지리의 모습을 과오름에 올라서 떠올려본다. 모래사장에 배를 대고서 물건들을 싣고 내리는 부산한 모습들이 상상된다. 시선을 돌려 밭들이 펼쳐진 농경지역을 바라보니 풍수지리에 밝은 곽지리 조상들의 설명에 공감이 간다. 곽지리의 형상은 선인기국형(仙人棋局形)ㅡ신선들이 앉아서 바둑을 두는 모습. 그렇다면 저 밭들이 바둑판이 되는 것이다. 바둑돌들은 더 큰 상상에 맡기도록 하고.
김홍대 이장에게 곽지리의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한마디로 대답했다. "후대를 위하는 마음." 선배들이며 마을 어르신들이 젊은 날 우리를 위해 어떻게 행동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자연스럽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마을이 지닌 정신문화라고 해야겠다. 지금 세대에 머무는 것이 아닌 존재로써의 마을공동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곽지리다.
과오름은 봉우리가 셋이 모여 있는 형상이라서 삼형제다. 큰오름, 셋오름, 말젯오름. 얼마나 정겨운가. 형제들을 오름에 빗대어 끊임없는 이야기의 원천을 삼은 지혜가 그냥 이뤄졌을 리는 없고. 선비마을의 전통에서 우러난 인격도야의 진면목을 바라본다. 올라서 바라보는 풍광 또한 일품이다. 곽지해변의 아름다움과 함께 펼쳐지는 바다풍경과 삶의 공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다가온다. 산을 보며 자란 사람은 심성이 깊고, 물을 보며 자란 사람은 그 마음이 넓다고 했던가? 곽지리 사람들은 그 둘을 모두 가졌다. 어질고 지혜로운 삶을 추구하는 마을공동체가 품격 있는 모습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를 아우르며 품은 이상을 펼쳐보이고 있는 것이다. 발전의 방향을 길고 멀리 내다보며 지금 세상에 등장하지 않은 후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마을. <시각예술가>
어떤 나무와 집들의 만남
<수채화 79㎝×35㎝>
이사무소가 있는 주변에 깔끔하게 아스팔트로 주차장까지 마련된 마을공동체의 중심공간이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나가는 길. 오래된 팽나무가 서 있다. 자동차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임에도 그대로 서있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왔다. 200살은 더 사셨을 것 같은 고목. 화면의 가운데 있는 슬레이트집이 초가이던 시절부터 모두 봤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으로 지붕이 개량되고, 돌담이 시멘트벽돌로 바뀌는 과정들까지. 함께 살았던 모두를 기억하고 있을 나무. 그러기 때문에 자동차의 불편은 감수해야 한다는 가치관. 겨울임에도 유독 저 나무 밑에 풀들은 초록으로 싱그럽다.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듯 해 신명나게 그렸다. 화면의 구도가 파격적이다. 장대저울 구조다. 왼쪽으로 왕창 쏠린 나무와 중심과 오른쪽에 배치된 집. 그 무게에 황금비 지점을 중심으로 평형을 유지하도록 색과 명도를 살렸다. 왼쪽 돌담 뒤 비닐하우스와 멀리 보이는 빌라들이며 최근 10년 어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집들이 아주 작게 보인다. 변화가 밀려오고 있음을 암시하듯이. 변화는 온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다고 하였으니 분명 온다. 그러기에 변하지 않아야 할 것들의 가치 또한 그 무게만큼 가치를 지닌다. 마을공동체의 정신적 가치가 그러한 소명의식이 아닐까 생각하며 그렸다. 변화와 전통이 공존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오늘이라는 너무도 쉽고 평이한 목표가 이렇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아름다움을 바라본다.
윤슬 눈부신 곽지해변
<수채화 79㎝×35㎝>
곽지패총의 조개껍질들은 모두 이 바닷가에서 나왔다. 2000년 전부터, 누군가 이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서 생명을 유지하고 그 껍질을 버렸으니 썩지 않는 그 껍질이 그들의 존재를 입증하는 근거가 됐다. 위대한 기억의 바닷가. 역사는 뭍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시작됐다고 했던가? 땅의 것으로만 살수 없고, 바다의 것으로만 살수 없으니 땅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살면 쉽게 죽지 않는다는 경험의 축적. 저 모래알 같은 경험들이 밀려오는 파도와 바람에 이리 쌓이고 저리 쌓이며 살아간다. 내일도 오늘처럼. 화산섬의 모래해변이기에 검은 현무암과 모래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검은색은 따스한 느낌을 줘야 하기에 물감이 아니라 먹으로 그렸다. 먹색은 물과 만나서 명도를 높이면 따스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바다와 모래 그리고 돌들이 화면 속에서 원근감을 충족시키며 만날 수 있는 구도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필자가 아는 한 곽지해수욕장의 이곳 뿐이다. 가장 큰 매력은 검은 현무암과 이런 화음을 형성하며 독특한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데에 있다. 태양광선이 부서지는 지점을 모래와 바다가 만나는 곳으로 특정한 것은 시간성의 무의식적 투영이라고 강조하고 싶어서다. 가까운 과오름이 화산분화하며 흘러내린 용암이 바다와 만나 이렇게 식었으며 숱한 세월의 풍화를 거치며 결국 오늘의 이런 모습을 갖게 됐다. 저기 검은 용암의 흐름과 떨어져 나간 바위 하나하나에도 시간성이라고 하는 가장 근원적인 자연의 이치가 숨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