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4)현길언의 '전쟁놀이'3부작-2

[4·3문학의 현장](4)현길언의 '전쟁놀이'3부작-2
상처 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지는 못자국
  • 입력 : 2008. 01.25(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남원읍 수망리에 있는 현의합장묘. 1949년 1월 희생된 남원읍 일대 주민들의 시신이'멜젓'담듯 세 구덩이로 나눠 매장되었던 것을 세차례 이장끝에 마침내 이곳에 잠들었다. /사진=강희만기자 hmkang@hallailbo.co.kr

열한 살 그때,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을까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피난민 아이들 속에서 또 한번 성장하는 소년


서귀포시 남원읍 의귀리 사무소 앞에는 2006년 세워진 4·3유적지 빗돌이 있다. 깨알같은 글씨로 4·3 당시 2백50여명의 주민이 희생됐다는 내용이 쓰여졌다. 의귀리만이 아닐 것이다. 인근 수망리, 한남리 등 당시 남원면 일대 마을은 크고 작은 희생을 치렀다. 현길언의 '전쟁놀이', '그 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 '못자국'으로 이어지는 성장소설 3부작은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낸 소년의 이야기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엉엉'하고 큰 소리로 우는 사람도 있었고, '죽일 놈들, 죽일 놈들'하고 큰 소리로 우는 사람도 있었다. 가족을 찾는 사람, 찾아서 부둥켜 우는 사람, 못찾아 우는 사람…."('그 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

주인공 세철이가 존경했던 고 선생님, 친구 명환이네 삼촌은 산으로 올라가버렸다. 어느날 마을에 '폭도'가 들이닥쳤다. 마을이 지글지글 불탔지만 세철이의 집만 무사했다. "이 집에는 불을 지르지 말아라." "소 몇마리는 남겨둬." '폭도'가 되어 돌아온 고 선생님은 "왜 반동네 집을 그냥 두십니까?"란 일행의 물음을 뒤로 하고 자신이 신세를 졌던 세철이 집은 온전히 남겨둔다.

이따금 들리는 총소리. 열한 살 그 때,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을까. 세철은 집을 잃은 사람들이 모여들던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 민수를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에 눈물까지 나오려 했다. "야 민수야, 너 살아있었구나!"

아이들은 공비를 잡아 처단하는 전쟁놀이를 새롭게 시작한다. 그것은 1학년때 했던 미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놀이보다 더 신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불패의 일본군을 선망했던 아이들은 이제 토벌대가 되어 '공비'를 쏘아 죽인다.

"운동장이나 지서 뒷밭에서 공비들을 처형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 때마다 지서에서는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지서 주임은 빙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 공비들에게 피해를 당한 유족들을 나오도록 했다. 불려나온 유족들은 핏발이 선 눈으로 분풀이를 하듯, 공비들에게 돌팔매를 던지고 몽둥이질을 했다. 나는 어느새 그런 일을 구경하는 것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그 때 나는 열한 살이었다')

번듯한 교실에서 공부할 꿈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4·3으로 불탄 학교를 재건하고 모처럼 새로 지은 교사에서 공부하나 싶었는데 피난민들이 몰려든다. 피난민 아이 유원이는 제주섬 바닷가에서 세철에게 말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사람을 죽이다니…." 6학년이 된 세철이는 미국은 우리편이고, 소련은 괴뢰군편이라고 배웠지만 유원이를 통해 또한번 혼란스러워진다. 미군 비행기가 남쪽으로 내려가는 피난민 행렬에 마구 기관총을 퍼부었고, 유원이도 그 바람에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다. 피난민 아이들속에서 소년들은 또한번 성장한다.

"전쟁중에 긴장하고 들떠서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본 군인이나 나카무라 교장 선생님이 그랬고, 대동아전쟁에 나갔던 삼촌과 환송하는 사람들, 4·3 사건때 이웃사람들 눈총도 그랬다. 사람이 일으킨 전쟁에 사람이 죽고, 집을 잃고, 고향을 떠나고…. 전쟁에 대한 무서운 일들이 자꾸 떠올랐다."('못자국')

누구한테 용서를 빌어야 할까. 세철은 몰래 시험문제를 훔쳐본 잘못으로 형에게 헛간 기둥에 쇠못을 박는 벌을 받는다. 하루일을 생각하면서 잘못을 저지른 수대로 쇠못을 박아야 하는 거였다.

긴 긴 여름, 어느새 기둥 밑동은 쇠못으로 가득찼다. 형은 이제 착한 일을 하는 대로 수시로 못을 빼라고 하지만 좀체 줄지 않는다. 화가 난 세철은 장도리로 쇠못을 빼내지만 그 자국은 되레 선명해졌다. 세철은 그 자국을 지우기 위해 자귀를 꺼내들고 기둥을 깎아내린다. 그런데 그것이 더 크고 뚜렷한 자국을 만들어낸다.

소설속에는 수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폭도'의 죽음이 그 하나다. 또다른 하나는 '폭도'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죽는 것이다. 세철이 어머니가 토벌대에게 끌려온 고 선생님의 부모를 보면서 "아니, 저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라며 혼잣말을 하지만 그런 죽음들은 숱했다. 여기에 더해 무장대와 싸우다 세상을 뜬 토벌대의 군인이나 경찰 등이 있다. 전쟁같은 세월을 나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서로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모든 것이 지나갔지만, 그 자국은 여기저기 흩어진 무덤가에 남아있다.

▲4·3의 희생터는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해안도로가 뚫리고 아스팔트로 뒤덮인 남원리의 진쟁이소금밭에서도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폭도 무덤에서 열사 비석까지

"커오는 동안 4·3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혹 말을 하더라도 동서남북을 살펴본 후에 소곤소곤거렸다."

양봉천(61·남원읍 의귀리) 현의합장묘 유족회장은 4·3으로 가족들을 잃었다. 그는 그동안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고 보듬는 일을 해왔다. 현의합장묘 조성은 그중 하나다. 1949년 1월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희생당한 주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남원읍 수망리에 있다.

몇해전만 해도 봉분 3기만 덩그러니 있었지만 이즈막엔 묘비, 내력비 등을 갖추고 4·3을 기억하는 공간으로 단장됐다. 입구엔 관리동을 겸한 기념관이 지어졌는데 아직 개관전이다.

현의합장묘는 세 번 이장됐다. 학살 당시 의귀국민학교 동녘밭에 매장됐다가 주변에 성을 쌓으면서 '개탄물' 동쪽으로 옮겨진다. 양봉천 회장은 당시 시신들이 '멜젓 담듯' 세 개의 구덩이로 나눠 매장됐다고 했다. 누가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곳에 가족이 매장되어 있을 거라 확신한 유족들은 삼묘동친회를 만들고 1983년 현의합장묘란 비석을 세운다. 그러다 2003년 지금의 수망리로 또한차례 이장한다. 유해발굴 과정에서 39구는 확인했지만 다수의 유골은 이미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현의합장묘가 민간인 희생자 무덤이라면 의귀리 속넹잇골엔 '폭도'가 잠들어있다. 4·3을 말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돌보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오래도록 덤불속에 방치되오다 2004년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제주4·3연구소, 현의합장묘유족회가 푯말을 세워 그 넋을 기렸다.

남조로를 타고 제주시에서 남원으로 향하는 초입에는 남원읍 충혼묘지(수망리)가 있다. 이곳에 있는 수많은 비석중 27기는 4·3당시 남원읍 일대에서 희생된 경찰, 군인, 민보단원을 '열사'로 추모하며 세웠다. 마을마다 있었던 것을 충혼묘지로 한데 옮겨놓았다.

현의합장묘, 속넹이골, 충혼묘지. 남원읍에 누워있는 세 개의 무덤은 4·3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들려준다. 아이들은 그 무덤의 사연에 뒤얽혀 자랐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514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