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문학의 현장](7)오성찬의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2

[4·3문학의 현장](7)오성찬의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2
용서하라, 그러나 잊어버리지는 말라
  • 입력 : 2008. 02.22(금) 00:00
  • 진선희 기자 jin@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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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의 주명구는 조몽구의 실제 생애처럼 표선백사장에서 4남매와 아내를 끔찍하게 잃었다. 소설가 오성찬씨가 먼 발치에서 그 날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김명선기자mskim@hallailbo.co.kr

4·3에서 6·25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비극
양충식과 정검사· 주명구와 배영길을 통해
용서와 화해만이 적극적 해결법임을 제시


이유도 모르면서 맞총질을 했다. 누구는 빨갱이였고, 누구는 토벌대였다.

"어쩌면 내가 그 지긋지긋한 사법고시에 패스하기까지의 저력도 그 울혈 같은 원한에서 연유되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때까지도 서슬이 시퍼런 검사가 되어서 빨갱이를 때려잡겠다는 일념에 불탔었으니까…."('나븨로의 환생')

오성찬씨의 연작 소설집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첫 머리에 실린 중편 '나븨로의 환생'은 맨 말미에 실린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두 작품엔 각기 상반된 입장에 놓인 인물이 등장하지만 결국 같은 선택을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의 주명구는 '4·3 사건 당시 남로당 제주도책'이었다. '부산에 도망가 있는 것을 제주도경 형사진들이 가서' 잡아온다. '나븨로의 환생'에 그런 대목이 있다.

'나븨로의 환생'의 배영길은 서북청년으로 제주섬에 들어왔다. 연인이었던 남녀 사이를 갈라놓는 것도 모자라 여자를 겁탈한다. 여자는 운명처럼 배영길을 맞아들이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뭇매를 가한다. 주명구가 긴 감옥살이에서 풀려나와 고향 영주리로 돌아갔을 때 받았던 냉대와 뭐가 다를까. 사건중에 마주보며 섰던 두 사람이지만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처지는 똑같다.

돌팔매가 날아오고 땅바닥에 패대기쳐도 두 사람의 반응은 고요하다. '난 이디가 좋은 걸'이라며 영주리를 떠나길 원치 않았던 주명구처럼 배영길도 당할 것은 당했다는 투로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욕하지 않는다. 자신들을 '피해자'로, 배영길을 '가해자'로 부른 사람들이 병든 배영길을 장작같은 몽둥이로 아무데나 패고, 무차별 발길질을 해댔다. 배영길은 그 일로 석달을 몸져 누웠다.

한 걸음도 떼어놓지 못하는 병에 걸린 배영길을 보며 딱한 듯 여자의 아버지가 말한다. "이상헌 일이다. 겁이 나서도 떠나려 할 땅에 발이 저려서 앉아 있어야 하니…."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에 주명구의 행적을 좇는 향토사학자 양충식이 있다면 '나븨로의 환생'엔 정검사가 나온다. 정검사는 전남 광주 근교에서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악몽을 꾼다. '1950년 9월 인민군이 밀려 내려오고 세상이 뒤집히자' 마을도 상황이 바뀐다. 마을의 하인이며 백정이었던 바가지(박아지)가 인민위원회 높은 자리에 오른다. 인민재판으로 정검사의 아버지도 끌려가 처참하게 죽는다.

4·3에서 6·25로 제주섬의 비극은 확장되고 있었다. 정검사는 배영길의 소사(小史)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복수심으로 불탔던 마음을 누그러뜨린다. 배영길의 여자는 예수를 통해 용서를 배우고, 정검사는 화해를 떠올린다.

"그 꿈은 희한하게도 천연색 꿈이었는데, 그 꿈에서 벼랑을 굴러 떨어지던 그 시래기 엮음 같은 사람들이 흰 나비 푸른 나비로 변해서는 주위를 현란하게 되날아오르던 것이었다. 그것들 속에는 아버지의 엄숙한 얼굴도, 바가지도, 매맞아죽었다는 서북청년 배영길도, 윤간당한 소녀의 얼굴도 마냥 웃으며 비누거품처럼 날아오르고 있었다."('나븨로의 환생')

'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의 실제 모델이 된 조몽구가 귀향후 살던 성읍리의 집은 옛 모습을 잃었다. 동네 사람들이 그를 원망하며 툭툭 허물던 돌담도, 내리쳤던 문짝도 세월속에 묻혔다. '숱하게 당해도 윽윽 안으로 분노를 삭이며 불평 한마디 없었'던 그 사내는 이 엄청난 비극을 씻어낼 수 있는 길은 용서와 화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용서는 하라, 그러나 잊어버리지는 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성읍 조몽구의 여정을 찾아나선 길에 동행한 오성찬씨는 "지금도 같은 마을에 아버지를 죽인 사람과 그 아버지의 아들이 같이 살고 있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이 상태로 가다가 만일 이념문제가 확산되는 계기가 생기면 4·3처럼 서로에게 총을 겨누는 문제가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면서 "종교의 그것처럼 용서와 화해야말로 4·3에서 6·25로 이어지는 현대사의 비극이 남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 왼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뺨을 돌려대며,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 모두가 엄청난 말들이었지만 그녀에게 꽉 막혔던 벽이 하나씩 무너지고 트여가는 걸 느꼈다."('나븨로의 환생')



드넓은 백사장이 일상적 학살터로

성읍민속마을에서 남쪽으로 난 길을 쭉 따라내려가면 표선 해수욕장이 나온다. 마침 썰물때라 백사장이 더욱 끝간데 없이 펼쳐진 듯 했다. 해수욕장을 가로질러 아스팔트가 깔리고 제주민속촌박물관이 인근에 들어섰지만 이 일대는 학살터였다.

"가서 보니까…. 지금은 민속촌이 들어서 있는디, 거기가 그때는 맨 순비기왓이었습주. 거기 모래판에서 팡팡 해부린 거라 마씀. 물애기, 등에 업은 건 보니까 총 개머리판으로 자락 패버렸습디다. 명주 찢어 쌌던 머리가 피로 벌겅헌 거라마씀."('한 공산주의자를 위하여')

조몽구의 4남매는 실제 이렇듯 당했다. 그의 조카 조모씨(68)의 말도 소설속 정황과 다르지 않았다. 당시 아홉살이던 조모씨는 사촌들이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표선 백사장에서 죽었다는 걸 알고 부모에게 성(姓)을 바꿔달라고 조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조몽구가 귀향후 살았던 성읍리의 집은 그 흔적이 지워졌다. 어느 시절엔 이 근처 텃밭에 그가 키우던 배추,무,파와 마늘 따위가 푸른 잎을 틔워냈을 것이다.



표선만이 아니라 백사장이 있는 곳은 '일상적 학살터'였다. 함덕 해수욕장 부근, 성산포 터진목이 대표적인 예다.

제주도와 제주4·3연구소가 펴낸 '제주4·3유적'을 보면 함덕 해수욕장 인근 진동산으로 불리는 곳에선 중산간 소개민들중에서 도피자 가족 20여명이 희생됐다. 진동산은 모래동산이 길게 이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다보이는 터진목도 희생터다. 당시 성산면 관내는 물론이고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주민까지 이곳에서 죽었다. 한모살로 불리는 표선 백사장에서는 4·3 당시 표선면, 남원면 주민들이 여럿 희생당했다. 가족 단위 산간 마을 주민들이 많이 붙잡혀온 탓에 한모살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어린이나 노약자들도 많았다.

제주4·3연구소 장윤식 연구원은 "이들 희생터 주변에 군부대가 상주해있어서 세 곳 모두 일상적으로 학살이 이루어진 장소가 되었다"고 했다.

'제주4·3유적'에는 표선 백사장을 소개하면서 "이곳에서는 대규모 집단 총살 뿐만 아니라 간간이 한 두 명이 끌려나와 총살되는 등 표선면 사무소에 군부대가 주둔하는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총살이 집행됐다"고 기록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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